[온고지신 젊은이들] 어머니와 함께 ‘해피소드’ 운영하는 김정 씨

외할머니, 어머니의 바느질과 뜨개질이 제 작품의 원천이죠

도시화와 디지털화로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속에서 결여되기 쉬운 따뜻함과 인간미, 예스러움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에서 미래의 희망을 읽어 내고, 옛것을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는 두 젊은이를 만났다.

지난 10월 서울디자인올림픽 행사장에 갔다 발길이 머문 곳이 있었다. 색색의 조각 천을 바느질로 잇고, 거기에 또 뜨개질까지 곁들여 만든 지갑과 가방, 휴대전화 주머니, 필통, 인형 등 갖가지 물건들.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것들로, 똑같은 디자인은 하나도 없었다. 예스러운 느낌이면서도 현대적인 게 요즘 유행하는 빈티지풍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물건들을 들고 나온 김정 씨.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원조할머니집’이란 간판을 내걸고, “외할머니의 바느질, 어머니의 뜨개질을 이어받아 3대째 내려오는 집”이라고 자신의 작업을 밝혔다. 음식점도 아니고, 3대째 내려오는 손재주로 작업을 한다니. 바느질과 뜨개질을 혼합하는 작업 방식이나 ‘원조할머니집’이란 개념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원조할머니집’은 작은 공원을 마주 보는 창 넓은 가게였다. 작고 독특한 물건들로 가득 찬 곳. 김정 씨와 어머니 조유순 씨가 함께 작업하는 이 공간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이들에게 작업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들도 있는데, 이들은 “삶의 고민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할머니집이 되겠다”고 한다. 엄마와 딸이 함께 운영하면서 물건을 파는 인터넷 사이트 이름이 ‘해피소드’. ‘행복한’(해피)과 ‘이야기’(에피소드)를 합해서 만든 이름으로, 김정 씨는 물건을 만들면서 이야기도 함께 짓는다고 했다. 지갑을 만들면서 흰 헝겊을 덧대다 그는 서너 살 된 꼬마가 누나에게 “누나, 나무도 백 살 먹으면 머리가 하얘져?”라고 묻는 걸 상상했다. 그리고 흰 헝겊 위에 바느질로 그렇게 써넣었다. 물건들을 만들면서 생겨난 이야기는 그걸 사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낳을 것이다. 김정 씨는 그렇게 이야기들이 퍼져 나가는 세상을 꿈꾸고, 상상한다. 하나하나 만든 물건들을 손님이 사갈 때, 그는 ‘판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데려가신다’고 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면서 만든 물건인데, 그걸 같이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쁘죠. 그러니 그걸 예쁘게, 아껴 사용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가 만든 물건들을 보면서 실용적인 것을 만드는 작업과 아름다움과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 사이에 굳이 구분을 둘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원조할머니집’의 뿌리에 대해 물었다. 외할머니. 누구 집 혼사가 있다 하면 바느질을 도맡아 한복을 수십 벌씩 지을 정도로 솜씨가 좋으셨다. 1938년, 일제 때 태어난 어머니도 그 재주를 물려받아 아홉 살 때부터 한복을 지었을 정도라고. 외할아버지는 한옥이든 일본 집이든 척척 지었을 정도로 유명한 대목이셨는데, 어느 날 막내딸인 어머니에게 대나무를 깎아 대바늘을 만들어 주셨다. 일본사람들이 뜨개질하는 것을 보고, 딸에게도 뜨개질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결혼해서 딸 다섯을 둔 어머니는 겨울이면 식구들 옷을 모조리 털실로 짜서 입혔다. 군목(軍牧)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부대가 있는 전국 곳곳을 돌며 살았던 가족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짜 준 털옷을 입고 언 논에서 스케이트를 지쳤고, 아버지의 털옷이 풀려 딸들의 망토가 되기도 했다. 독특한 디자인의 따뜻한 털옷을 입은 딸들을 보고 시샘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정작 “우리도 겨울에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싶다”고 투정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교복까지 직접 지어서 입혔다. 교복집에 가서 천만 떠 와서는 딸들 몸에 딱 맞게 피트된 교복을 만들어 줘, 어디서도 딸들의 맵시가 빛났다. 뜨개질책을 수시로 사들여 트렌드에 맞춰 뜨개질을 하면서도 한 번도 책 그대로는 짜 본 적이 없는 어머니. 항상 새로운 시도로 창작을 하던 어머니처럼 딸들도 미적 감각이 남달랐다. 딸 다섯 중 두 명이 미대에 진학했다.


영화 <두 얼굴의 여친>에 등장한 지갑

함께 작업하는 김정 씨와 어머니 조유순 씨. 김정 씨가 입은 스웨터는 어머니가 지난해 털실로 짜 준 옷이다.
넷째 딸 김정 씨.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의 원래 꿈은 광고 디자이너였다. 대학 졸업 후 광고대행사에 취직했고, 한때는‘나도 국장까지 해 봐야지’라며 커리어우먼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기계적인 작업에 회의가 들었다. 차갑고 정형화된 게 인간미도, 재미도 없었다. 다 쓴 수첩도 버리지 않고, 그 뒤에 겹겹이 종이를 붙여 사용할 정도로 ‘예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그였다. 조직에서 정상까지 올라가겠다는 꿈도, 외부적인 요인으로 조직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면 하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 올라가기보다 넓어지고 싶다고,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다. 그때 그의 마음을 붙잡은 게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바느질과 뜨개질이었다. 바느질과 뜨개질이 합쳐진 새로운 작업. 창시자인 그는 아직 그 작업에 대해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누가 나랑 똑같은 걸 들고 있으면 창피하고 숨기고 싶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 물건은 내가 직접 만들어서 들고 다녔는데, ‘진짜 네가 만든 거야? 팔아도 되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2002년 말 회사를 퇴직한 후 내가 만든 물건들을 인터넷을 통해 팔기 시작했어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부업처럼 시작한 거죠.”

2004년, 부업을 본업으로 바꾸면서 그는 어머니를 이 일에 끌어들였다. 다섯 딸을 키우고, 다시 그 딸들이 낳은 손자 다섯을 키워 낸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딸들도 뿔뿔이 흩어져 살아 이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신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에게 김정 씨는 자신의 꿈을 털어놓고, ‘같이 하자’고 했다. 어머니는‘작업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어디 물량을 댈 수 있겠느냐?’고 했지만, 결국 딸의 꿈에 동참했다. 김정 씨는 사업자 대표로 어머니 이름을 올렸다. 가족을 위해 평생 이름 없이 살아오신 어머니에게 이름을 찾아 드리고 싶었다. 대신 그는 책임 디자이너가 됐다. 작업 속도나 숙련도나 어머니를 따를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미대와 광고회사를 다니며 벼려진 디자인 감각이 있지 않으냐고 했다. 어떨 때는 김정 씨가 작업반장이 되어 “이거, 내일까지는 꼭 완성해야 돼”라고 어머니를 닦달하기도 한다.

엄마와 딸이 만든 물건들로 가득한 ‘원조할머니집’.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골수팬도 많이 생겼다. 한번 물건을 사 간 고객이 그 손맛을 잊지 못해 다른 아이템들을 계속 구입한다고. 유명세를 타면서 정려원, 봉태규 주연의 영화 <두 얼굴의 여친>에도 그가 만든 지갑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했다. 술만 마시면 딴 얼굴이 되는 정려원과 봉태규가 ‘엮이게’ 된 계기가 봉태규가 정려원의 지갑을 주우면서. 정려원이 연기한 여자 주인공만큼이나 독특한 지갑이었다. 서울디자인올림픽에 참가한 얼마 후인 지난해 11월 중순, 그는 도쿄디자인페스터에도 참가했다. ‘넓어지고 싶다’는 김정 씨의 꿈대로 요즘 그의 활동영역은 부쩍 다양해졌다. 생활창작 작가들의 모임인 ‘프리마켓’ 멤버로, 성매매여성 자립을 위한 기관인 ‘이룸’과 대학로에서 강의하는 일로 부쩍 바빠졌다. 어린이들에게 강의하기도 하는데, “삐뚤빼뚤한 바느질로 굉장히 순수한 작품이 나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집에서 작업하다 지난해 창 넓은 작업실 겸 가게를 마련했다는 조유순 김정 씨 모녀. 김정 씨의 꿈은 조금 더 컸다.

바느질과 뜨개질로 만든 인형과 지갑.
“2층짜리 건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1층에서는 작품 판매도 하고 강좌도 하고, 커피숍과 디자인 사무실도 있고요. 2층은 갤러리였으면 좋겠어요. 실용성보다 작품성 비중이 큰 제 작품과 다른 작가들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공간으로요.”

사진 : 이창주
  • 200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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