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 ‘세쌍둥이네 풀꽃세상’ 산장지기 이하영 씨

눈 속에 파묻힌 하늘 아래 첫 동네

“첫눈이에요. 하늘만 빼고 모두 다 하얀 세상이에요.”
지난해 11월 28일 새벽,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전화가 왔다.
남설악 끝자락 해발 700m 부근에 자리한 강원도 인제군 진동리 마을.
1년의 절반은 눈 속에 싸여 있는 곳. 설악산자락,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라 해서 사람들은 이곳을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부른다.
왼쪽부터 셋째 다래, 둘째 도희, 이하영 씨, 첫째 나래. 이곳을 찾은 11월 29일은 마침 세 쌍둥이의 생일이었다. 쌍둥이들은 도시에서 사 간 커다란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 판을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신년호 특집으로 새하얀 눈 세상이 펼쳐진 하늘 아래 첫 동네 풍경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싶어 진동리의 첫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화를 받은 다음 날 진동리로 출발했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을 달려 진동리에 도착했다. 전교생이 열 명인 진동분교를 지나 10분 동안 눈보라를 헤치고 ‘세쌍둥이네 풀꽃세상’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내린 눈은 10cm가 넘게 쌓여 있었다.

털모자에 솜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세쌍둥이네 풀꽃세상’지기 이하영 씨가 반갑게 맞는다. 차에서 내리자 쨍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난생처음 맡는 투명하고도 알싸한 공기. 이하영 씨는 “오늘은 눈이 와서 날씨가 푹한 편이에요”라며 맑게 웃는다. 사방이 온통 눈 세상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능선 때문에 여성스러운 산이라는 점봉산도, 잎 떨군 나뭇가지 위에도 온통 눈이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도 도시인에게는 낯설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이하영 씨와 세 쌍둥이가 사는 산장의 눈 내린 다음 날 아침 풍경. 언제 눈이 왔냐는 듯 밤새 흐리던 하늘이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이곳은 ‘설피마을’로도 불린다. 설피는 눈이 많이 올 때 신발 위에 덧신는 신발. 앞 사람이 설피를 신고 걸어 길을 만들면 그 다음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고 한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1m 넘게 쌓여 발이 묶였는데, 전기 검침하는 아저씨가 설피를 신고 길을 내면서 왔다고 한다.

이하영 씨는 이곳에서 15년째 세 쌍둥이 나래, 도희, 다래와 살고 있다. 다태아인 이들은 16년 전 시험관아기로 태어났다. 둘째 도희는 아들. 세 쌍둥이는 진동분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그 학년에는 세 쌍둥이뿐이었다. 이웃에 가려면 10분 넘게 걸어가야 할 정도로 집이 띄엄띄엄 있는 마을. 눈이 허리춤까지 쌓인 날 밤이면 그는 길 양쪽 눈밭 위에 수십 개의 촛불을 켜 놓는다고 한다.

이하영 씨는 이화여대 국문과 78학번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문학도가 어떻게 강원도 심심산골까지 왔을까?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이따금 백구 천원이와 꽃순이가 들여다보고 갔다.

“복잡하게 머리 쓰는 일이 싫었어요. 단순노동을 하고 싶었고, 막연히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우연히 오게 됐지요. 처음에는 소풍 오는 기분이었어요. ‘언제든 떠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니까 도시 생활이 두려워져 다시 못 돌아갈 것 같네요.”


해발 700m에 사는 게 인간 생체리듬에 제일 좋대요

산장 옆에 나란히 들어선 펜션. 8팀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공간은 황토 흙을 섞어 지었다. 곳곳에서 이하영 씨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진다.
시험관아기로 태어나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세 쌍둥이를 데리고 산골에 온 게 1993년. 15개월 된 세 쌍둥이는 이곳에 와서 잔병치레 한 번 안 하고 자랐다.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장 좋다는 해발 700m 고도에서 이들은 샘물을 찾아내 연결한 수도에서 물을 마시고, 무농약으로 재배한 채소를 먹는다.

이곳을 지나가다 하룻밤 재워 달라는 사람들의 청에 민박을 시작했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위한 집을 따로 지었다. 집 구석구석에는 이하영 씨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황토를 채에 내려 황토집을 짓고, 커튼을 만들어 달았다. 이웃에 사는 도예가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옷걸이며 전등에서 자연미가 물씬 풍긴다. 4년 전 짓기 시작했다는 산장은 지금도 미완성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붕을 얹고, 지붕에 칠을 하고, 집안을 장식할 퀼트를 만들고 하는 식이다. 입구에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지만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있다. 이날도 서울서 온 일행이 한 팀 더 있었다. 이곳에 오면 주인과 손님의 구별이 없다. 손님이 밥을 짓기도 하고, 가져온 반찬거리를 주인에게 건네기도 한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가 이어지고 폭설 때문에 발이 꽁꽁 묶이다가도 봄이 되면 눈을 뚫고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걸 보면서 이하영 씨는 많은 것을 느낀다.

“늘 자연을 보면서 살잖아요. 계절에 따라 어김없이 꽃이 피고 나무가 무성해지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사람의 생로병사를 느껴요. 예전에는 힘든 일이 생기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는 분노가 많았는데, 여기 와서 수용하는 법을 배웠어요.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잖아요. 내가 잘 익어 가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내가 좋아요.”

꽃순이와 천원이. 꽃순이는 친화력이 강해 누구에게나 달려들지만, 천원이는 콧대가 높아 주인 말만 따른다고 한다.
그가 처음 진동리에 왔을 땐 20여 가구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70여 가구로 늘었다. 이곳에서 그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찾아오는 손님과 허물없는 친구가 되면서 삶이 풍성해졌다고 한다. 6년 전부터는 “저절로 자란 꿈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눈길을 한 시간 동안 뚫고 인제도서관에 가서 수묵화도 배우고, 이웃에 사는 도예가에게 도예도 배운다. 설악초일향회 다도 사범, 곰배령 숲 해설가로 활동 중이고, 지역신문과 잡지에 틈틈이 세 쌍둥이와의 산골생활을 담은 ‘설피밭 편지’를 연재한다.

이곳은 예측불허의 자연재해가 빈번하다. 폭설 때문에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건 예삿일이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고춧잎에 송송 구멍을 내 버리기도 한다. 웬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강해서 살아남는 것일 수도 있고, 살아남아서 강해지는 것일 수도 있어요. 험하기는 눈이 와서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도시의 다리가 무너져 내리고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 게 더 험하죠. 여기에서는 아름답게 험해요(웃음).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걸 보면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요.”

자연미를 살린 펜션 내부. 왼쪽부터 통나무 장작으로 때는 벽난로, 버려진 나무로 만든 옷걸이, 이웃에 사는 도예가의 도움으로 만든 전등갓.
한여름 곰배령 정상에 흐드러지게 피는 야생화도 절경이라고 한다. ‘곰배령’은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하고 벌떡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해발 1100m 고지에 5만여 평의 평원이 형성돼 있다. 경사가 완만해 할머니들도 콩자루를 이고 넘어 다니던 곳이라 한다. 동자꽃, 노루오줌, 어수리, 구릿대, 둥근이질풀 등 희귀한 야생화가 만개해 있어 식물학자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이곳은 ‘죽기 전에 가 보아야 할 산’으로 종종 소개된다.

(좌) 산장 처마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풍경.
(우) 펜션 앞 벤치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오후 5시가 채 안 됐는데 산골에는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골의 아침은 늦게 찾아왔다. 8시가 되니 해가 떴다. 아침은 저녁과는 또 다른 세상이다. 햇살이 새하얀 눈 위에 쏟아지자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늘은 언제 눈이 왔느냐는 듯 새파랗다. 바늘로 찌르면 파란색 물감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늦잠 자고 일어난 세 쌍둥이는 눈 위를 구르며 눈싸움을 한다. 설피마을을 떠나려는 기자에게 이하영 씨는 아침 내내 끓인 감피차를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의 주인은 나인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살아요. 건강을 잃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죠. 자연의 에너지가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세쌍둥이네 풀꽃세상 홈페이지 www.jindong.net(033-463-2321)

(좌) 공해 없는 깨끗한 눈이 얼어 매달린 고드름. 이곳에서는 ‘얼음과자’라고 부른다.
(우) 심심산골에서 네 식구가 살기 무서웠던 것일까? 입구에 장승이 눈을 부라리며 서 있다.
  • 2009년 01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08

201908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08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