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23) | 집배원 아저씨의 선물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바람 소리, 개울물 소리가 어쩐지 달라졌다 싶습니다. 가을이기 때문일까요. 하긴 산골짜기 바람 소리라는 것은 대개 나뭇잎, 풀잎을 흔들고 스칠 때의 음향이니, 무성했던 이파리가 이미 절반 넘게 떨어진 이즈음과 여름날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빈 가지를 돌아 나온 이 빠진 바람 소리…, 지난 계절의 무모함을 뉘우치며 졸졸거리는 개울물 소리를 배경으로 새들만이 먹을 게 많아 날마다 축제여서 기운차게 재재거립니다.

다락방 창 너머로 몸을 내민 채 그렇게 가을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개들이 와르르 짖으며 뜰로 들어서는 손님을 알립니다.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하는 소리는 집배원 아저씨 같습니다. 문을 밀고 나가며 반기는 남편 소리를 들으니 틀림없습니다.


경험에 의하면 시골 아저씨들은 안주인이 안 나타나는 것을 오히려 편안해합니다. 수줍음이 많은 분은 내가 창가에 얼핏 비치기만 해도, “이다음에 오지요” 하고 허둥지둥 돌아서기도 하니까요. 처음엔 제대로 대접한답시고 이것저것 내오고 지루함을 무릅쓰고 꼬박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기도 했는데, 순간순간 내가 자리를 뜰 때마다 웃음소리며 말소리가 편안해진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 원, 내가 그렇게 무섭나?”

접대의무가 줄어 좋아라 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해지곤 했습니다.

“시골이라 남녀유별, 외간남녀 간에 피하는 유교풍속이 여전한 건데 뭘.”

공자님이 만든 삼엄한 자기 관리 내지 검열 기제에는 나중에 프로이트 선생이 역설하는 리비도이론까지 꿰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하여튼 공자님은 위대하고도 위대해… .”

그래 놓고 비슷한 일로 무안당한 마음을 가눌 때마다 늘 하는 소리를 덧붙이게 됩니다.

“남자 대 여자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지내면 유익한 일이 훨씬 많을 텐데.”

그래저래 남편도, 나도, 손님들도, 현재 안주인은 외출 중인 걸로 하자는 데 합의합니다. 하지만 유령인간 행세하는 것도 편한 노릇은 아닙니다.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어도 귀는 자꾸 두 사람의 담화를 향합니다. 또한 펼쳐놓은 책의 행간으로, 지금이라도 따뜻하게 마실 만한 걸 만들어 내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들이 들락날락거리기도 합니다.

숲 골짜기에 집 짓고 들어앉기 전부터 드나들던 집배원 아저씨는 벌써 5년째 우리 집을 드나드는 참입니다. 담당 구역이 바뀌어서 잠깐 발길이 뜸했던 적도 있었지만, 꾸준히 숲 골짜기 방문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무슨 긴요한 얘기를 주고받는다기보다는 ‘이즈음의 이런저런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러저러한데 작가 선생 생각은 어떠시오?’라는 게 집배원 아저씨가 주도하는 그 담화의 기본입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런 모양새로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문득 용건을 끝내고 아저씨가 일어서는 소리가 납니다. 다시 개들이 왈왈거리고, 그럼 잘 지내시라는 둥 조심해 가시라는 둥 인사 소리가 이어집니다.

그제야 나도 비로소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걸 만천하에 알리듯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참인데, 또다시 바깥에서 두 사람 소리가 들립니다. 다시 유령 안주인 행세….

이번에는 확실히 가셨겠지, 싶은데도 조심조심 바깥을 내다봅니다. 남편이 무슨 상자를 받아 안고 올라오는 게 보입니다.

“아저씨도 참…. 이게 뭔지 알아맞혀 봐.” 가다 말고 돌아온 아저씨가 손짓해 불러서 개울 다리까지 내려갔더니 이 상자를 차에서 내려 주고 가더랍니다. 남편이 조심조심 끈을 풀 때부터 그것이 소리를 내는 통에 정체를 짐작했습니다만, 정말 그 조그만 상자에서 동물이 둘씩이나 튀어나오는 통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어이쿠, 이게 뭐야?”

‘흑계’라고나 할 만한 이상하게 검고 낯선 모습의 닭 한 쌍이 태연히 마당을 돌아다니는 걸 바라보며, 바깥주인이 급히 닭장 만드는 걸 바라보며, 유령 안주인은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립니다.

“대체 무슨 뜻으로 이걸 주신 걸까?… 원래 이걸 주시려고 오셨던 걸까, 집에 가져가려던 걸 주고 가신 걸까?… 혹시 유령 안주인에 대한 유머일까?”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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