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다기전시회 여는 싱가포르항공 승무원 오예리 씨

한국의 차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지난여름과 올봄, 두 차례에 걸쳐 싱가포르에서는 한국 다기전시회가 열렸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싱가포르에 한국 다기가 정식 전시회를 통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동안 다도(茶道) 하면 중국과 일본의 문화라고만 여기던 싱가포르인들에게 이 전시회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전시를 기획한 사람은 싱가포르항공 승무원인 오예리 씨(31). 그는 작가 선정에서부터 작품 구입, 싱가포르 현지의 갤러리 대관과 홍보자료 제작 등 모든 준비를 자비를 들여 혼자 처리했다. 도예가도 아니고, 전문 전시기획자도 아닌 그가 이처럼 ‘큰일’을 낸 데는 사연이 있다.

“스물두 살 때였어요. 뉴욕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들렀는데 거기 한국섹션이 있는 거예요. 반가운 마음에 설레며 전시실로 들어갔는데 그 빈약하고 초라한 모습에 말도 못 하게 실망했어요. 그동안 우리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죠. 그때 깨달았어요. 이건 우리 문화가 결코 보잘 것 없어서가 아니라 알리려는 노력, 즉 마케팅과 홍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그날 이후 그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멋진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품었다. 대학 졸업 후 싱가포르항공사 승무원이 되어 싱가포르 현지에 거주하며 외국인 동료들과 생활하는 동안 그 꿈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조금은 가깝다고 느끼던 아시아 국가들조차 한국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한국 문화를 보여줄 것인가를 한동안 고민했어요. 그러다 엄마가 취미로 배우고 있던 다도를 떠올렸지요. 다기를 통해 우리나라 도예 작품의 우수성과 일본ㆍ중국과는 또 다른 차문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까지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8년 전, 뉴욕에서 품었던 꿈은 싱가포르에서의 다기전시회 계획을 시작으로 마침내 첫 단추를 꿰었다. 비행 스케줄에 따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업무 특성상 준비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잠을 줄이고, 쉬는 시간을 줄였다. 한국에 들를 때마다 부모님이 계시는 대구로 내려가 문경, 이천 등지의 도요를 찾아다니며 작가들을 만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입했다. 그때마다 그와 동행하며 “성공이든 실패든 배우는 것이 있을 테니 열심히 해보라”며 등을 두드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님이었다. 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근무하다 지금은 보건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 오태호 씨와 오랫동안 다도를 공부한 어머니 김경희 씨는 소문난 미술애호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미술관으로 주말나들이를 다녔을 정도로 예술작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부부는 우리 문화를 알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딸을 적극 지원했다.

하지만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싱가포르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전시장 마련도 여의치 않아 무작정 싱가포르 정부기관과 갤러리 등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처음 시도하는 전시회인 만큼 그의 아이디어에 호감을 표하는 곳은 많았지만 정작 대관을 해 주겠다는 곳은 없어 한동안 마음고생도 했다. 그러던 중 마침 개관 준비 중이던 한 갤러리와 연락이 닿았고, 그의 설명을 들은 갤러리 관장은 흔쾌히 대관을 허락했다. 그것도 무료로. 그가 싱가포르에서 꽤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사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해서 2007년 8월 15일, 대망의 첫 전시회가 열렸다. 연파 신현철, 백담 이광, 미산 김선식 등 11명의 작가에게서 구입한 다기 40여 점이 전시된 갤러리는 첫날부터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게다가 갤러리 관장이 자신과 친분 있는 VIP 고객들을 대거 초대해 전시회는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오예리 씨가 가장 좋아하는 다기. 신현철 선생의 작품으로 연꽃을 형상화했다.

싱가포르에서 연 첫 전시회가 성황 이뤄

“싱가포르에서는 일본이나 중국의 다도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일반적인 전시회가 아니라 다도를 시연하면서 간단한 파티 형식으로 진행했지요. 그것 때문에 엄마가 대구에서 싱가포르까지 날아와 도와주셨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화려한 중국식이나 아기자기한 일본식과는 다른, 한국 다기의 소박하면서 우아한 매력은 곧 싱가포르인들을 사로잡았다. 즉석에서 8점의 다기가 팔렸을 정도. 시기적인 운도 따라 주었다. 마침 드라마를 필두로 한 한류열풍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싱가포르 내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진 상태였다.

첫 전시회의 성공에 힘입어 한국관광공사 싱가포르지사의 일부 후원을 받아 올 2월 말 두 번째 전시회도 열었다. 전시공간인 한국 홍보관과 홍보물 제작비용을 지원받았지만 전시할 작품을 구입하고, 전시장을 꾸미고, 작품을 촬영하는 등의 경비는 여전히 그의 몫이다. 지금까지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를 묻자, 그는 “승무원 생활하면서 번 돈은 다 썼다”며 웃었다.

“수천만 원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10년 가까이 품어 온 꿈을 펼치는 일인데, 이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만큼 제게는 중요한 프로젝트이고요. 그리고 이 다기들은 전시하지 않고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잖아요.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애착이 가는 작품들이라 전시회 때 팔리면 저는 오히려 마음이 아파요.”

다기의 매력에 빠지면서 정식으로 다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내년에는 디지털대학 다도학과에도 입학할 예정이다. 차문화를 통한 우리 문화 알리기 작업이 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보람도 크지만, 그는 요즘 부쩍 혼자 하는 작업에 한계를 많이 느낀다. 세 번째가 될 베트남에서의 전시 일정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경기침체 여파로 후원을 약속한 기업에서 “어려울 것 같다”는 답을 들은 후 대안을 찾지 못한 것. 그래서인지 그는 “경제적인 도움을 줄 기업이든,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선뜻 빌려 줄 작가든, 더 활발한 활동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지 원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거창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죠. 여건만 된다면 앞으로 중동, 아프리카까지 가서도 전시회를 하고 싶어요.”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조금만 포장해서 내놓으면 우리 문화도 충분히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오예리 씨. 단아한 얼굴, 온화한 표정과 달리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힘이 실렸다. 이렇게 스스로 민간외교사절이 되어 해외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그리하여 우리 문화가 세계 무대에서 새롭게 조명받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진 : 이창주
  •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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