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21) | 풀 덤불、책 덤불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찌륵찌륵 치치, 치르르 치르르… 풀벌레 소리가 행간을 들락거린다 싶더니 들고 있던 책이 손에 없습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봅니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이런,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어이쿠, 큰일났네” 하고 튀어나오는 소리를 얼른 “아, 잘 잤다”로 바꾸면서 일부러 커다랗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이랄까요, 요즘 저는 시시때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탄을 애써 감탄으로 뒤집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말을 바꾸는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는 데 새삼 놀라워하면서요.

남은 시간을 알뜰히 쓰기로 마음먹고, 그 장한 마음에 햇빛을 쐬어주러 나갔습니다. 현관 앞뜰 한쪽은 잔디밭이고 한쪽은 풀밭, 주머니 사정만큼 사다 심은 잔디며 풀이며 깎고 다듬을 새 없이 사람 발길 닿는 자리만 간신히 길이 나 있는 것이 새삼 재미있어 깔깔 웃는데 곰돌이란 녀석이 멀뚱멀뚱 올려다봅니다. 그 모습이 우스워 또다시 깔깔… 산속에서는 멀리서 말하는 소리도 바로 곁인 듯 잘 들리는데, 개울 건너 할머님들이 흉하다 하실라 그만 웃자고 해도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숲 골짜기로 쏟아지는 햇살이며 바람의 엔도르핀 세례를 받은 모양입니다.


그러고 들어와 책 보따리며 노트북을 거실 탁자에 펴는데 너무 환해서 도무지 일할 기분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는데, 거긴 한낮에 꽤나 후끈거리는데다 너무도 아늑한 탓에 마땅찮게 여겨졌지요. 결국 장화를 신고 어깨에 이 가방 저 가방을 멘 채 뒤뜰로 나갔어요. 서고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장화 안 신고 지나다닌 탓에 발등이며 종아리가 엉망진창이 되었던 교훈을 떠올리면서요.

뒤뜰은 가히 밀림이라 할 만합니다. 온갖 풀들이 자라고 자라서 앞뜰에 나무 심고 잔디 심기 전엔 주말 저녁마다 식탁을 차리던 나무 탁자가 보일 동 말 동 합니다. 의자로 쓰던 나무둥치들은 감쪽같이 풀 덤불에 묻힌 지 오래고요. 아마 여름이 조금 더 길다면 여기는 풀바다가 되겠지요. 서고는 풀바다에 배처럼 둥둥 떠서 다른 숲 골짜기로 떠나 볼 마음까지 먹을지 모릅니다.

풀 덤불 지나 서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긴 책 덤불입니다. 숲 골짜기에 집 짓기도 전에 컨테이너 한 채를 사서 앉히고 책짐부터 옮겼는데, 그러고 나서 한 번인가 마음 내어 책을 꽂고는 더 어째 볼 엄두를 못 낸 채 지금에 이르렀지요. 더구나 관리 체계라 할 만한 것도 없이 대출 노트 한 권 놓고 양심껏 빌려 가기로 약속만 한 채 동네 꼬마들과 이웃들에게 개방한 상태라, 이 혼돈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갈 뿐입니다. 개울 건너 소라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렸고, 명절 방학 때면 아랫마을의 유일한 어린이 영훈이며 할머니 할아버지댁에 다니러 온 아이들이 왔다 가는데, 이용객이 많았던 날에는 도깨비 잔치한 자리마냥 난장판이 되어 있곤 합니다. 실제로 도깨비들도 와서 책 읽고 뒹굴다 가는지 모르지요. 멧돼지, 고라니, 청설모며 두더지도요.

서고 문을 열 때마다 ‘누가 내게 딱 사흘만 주면 근사하게 정리할 텐데’ 하기도 하고, 우연히 서고 얘기를 들은 마음 좋은 사서 선생님 한 분이 ‘제가 한번 휴가 내어 싹 정리해 드릴게요’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간신히 시집이 꽂힌 책장 하나가 볼만하게 되어 있을 뿐 뒤죽박죽입니다.

일 좀 하겠다고 양 어깨에 노트북, 책 보따리 메고 장화 신고 울울창창 풀 덤불 지나 뒤죽박죽 책 덤불 속에 이르렀지만, 여기 또한 정신 모으고 일하기엔 너무도 해찰거리가 많습니다. 아, 며칠 전 찾던 책이 여기 있잖아! 하마터면 새로 살 뻔했네…. 이거, 진짜 읽고 싶었던 건데 딱 열 페이지만 보고 일해야지…. 야, 지금 쓰고 있는 원고에 필요한 자료가 여기 있네, 어디 한번 보자…. 이건 원주 강의에서 필요한 거고, 요건 광주 강의에서 필요한 거…, 지난번 서울 강의 갈 때 가져가려고 그렇게 찾던 게 여기 있네….

그래저래 책 찾기, 책 읽기에 빠져 한 세월이 다 갑니다. 어릴 때 바닷가 도시의 그 적산가옥 다락에 앉아 그랬듯이, 여학교 때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서가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랬듯이, 꿀처럼 달콤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내 사랑, 덤불들!●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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