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데이비슨 타는 HOG 회원들

‘오토바이 타고 유라시아 횡단’ 꿈 이룬 사나이들

그들을 위협한 것은 열악한 길과 졸음. “졸면 죽어~”라고 서로 경계하며 달렸다.
오토바이를 보통 자유의 상징으로 생각하는데, 그 ‘자유’를 지키려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절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시간이었다.
지난 6월 25일 속초항, 30대 후반부터 60대 초반까지 22명의 남자가 배에 올랐다.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다져 놓은 중년 남성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자유의 상징이자 로망인 오토바이 할리데이비슨과 함께였다.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에 빠진 HOG(Harley Owner Group) 회원인 이들은 ‘애마와 같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중원을 누벼 보자’는 생각 하나로 유라시아 횡단에 나섰다.

원래 베이징, 시안 등 중국 대륙을 지나갈 예정이었는데, 출발 1주일 전에 길이 바뀌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가 테러 위협이 있다며 이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계획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 봉착했지만 이들은 “마음먹은 일이니 일단 부닥쳐 보자”며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를 지나는 것으로 급작스럽게 루트를 바꾼 것이다.

오토바이로 유라시아를 횡단하기는 이들이 세계 처음. 장원기 HOG 회장(60세)은 “누군가 먼저 이 길을 갔었다면 처음부터 도전할 생각도 안 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니 우리가 간다”고 했다. 러시아 자루비노 항구에 내린 이들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폴란드를 거쳐 8월 12일 독일 함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47박48일 동안 1만5200km를 달렸다.


여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험했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순간도 많았다. 러시아의 도로는 분화구처럼 중간중간 움푹 파여 있었다. 도로 사정이 너무 나빠 차들도 도로를 버리고 모래밭으로 다닐 정도. 일정은 계획보다 자꾸 늦어졌고, 예약해 놓은 숙소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횡단 기간 중 대부분을 도로 곁에서 잠을 자는 비박으로 해결해야 했다. 1인용 텐트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오토바이 사이에 침낭을 깔고 잠을 청했다.

각자 제자리에 돌아가면 “사장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먹는 것, 자는 것, 배출하는 것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15소년 표류기》의 아이들처럼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렵게 찾은 주유소에서 생수를 살 때 그곳에서는 흔하지 않은 ‘가스 없는 물’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 대신 먹으려고 컵라면을 슬그머니 감추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 작은 음식점에서 밥을 먹은 후 모두 설사로 고생하기도 했다.


횡단 여정 중 가장 어려운 고비는 모래밭길에서 오토바이가 전복되면서 갈비뼈를 다치는 등 4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해를 마주 보며 달리자니 요철이 심한 도로를 제대로 보지 못해 생긴 사고였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지만, 느릿느릿 오는 앰뷸런스나 열악한 현지 병원 사정이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앰뷸런스가 늦게 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협감이 들게 만들었다. 험한 길을 하루 종일 다니다 보면 오토바이의 볼트와 너트가 다 풀릴 정도. 애마처럼 아끼는 할리데이비슨이 여기저기 상처를 입는 것도 가슴 아팠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도착한 이들은 이곳에서 며칠 쉬면서 부상자 치료를 하고, 오토바이도 정비했다. 850km를 달려야 하는 우랄 사막을 앞두고였다. 부상자를 포함해 9명이 이곳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남은 사람은 횡단을 계속했다. 우랄 사막은 이들에게 ‘우라질 사막’으로 불렸다. 섭씨 49도 땡볕 아래를 달리는 이들을 보고 트럭 운전사들은 “미쳤다”고 했다.


분화구같이 울퉁불퉁한 도로 달리며 “졸면 죽어~”

유라시아 횡단을 마치고 돌아온 장원기 HOG 회장과 손영배 씨.
마지막 일정은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 속도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잘 닦인 도로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손영배 씨(48세)는 이때 “내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소망을 이뤄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1990년대 출장 갔다 독일 아우토반에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을 보고 할리데이비슨을 장만할 때부터 아우토반을 달리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손씨는 오토바이 마니아였던 아버지 덕에 고등학교 때부터 오토바이를 탔다. 70대인 아버지는 어머니를 뒤에 태우고 전국 구석구석을 다닌 오토바이 마니아 1세대. 이제는 나이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아버지는 그의 유라시아 횡단 계획을 누구보다 반겼다.

심승일 삼정가스공업 대표(53세)는 오토바이를 탄 지 1년이 안 된 초보자급. “가서 속 썩이지 않게 미리 체력훈련을 할 테니 꼭 데려가 달라”고 사정해 대열에 합류한 그는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다시 달려 ‘오뚜기 심’이라 불렸다. “겁 없이 어려운 코스에 도전했지만 어려움과 고생도 달리 생각하면 재미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휴가로 떠났던 미국에서 우연히 할리데이비슨 타는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고 그 자유분방한 모습에 가슴이 뛰어 한 잠도 못 잔 후 HOG 회원이 됐다. 이렇게 설레고 가슴 뛰게 하는 대상이 있기에 나이를 모르고 산다고.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권혁진 씨(38세)는 1년치 휴가를 한꺼번에 쓰면서 이번 횡단에 참여했다. 바이칼 호수를 지날 때는 18시간 동안 쉬지 않고 1080km를 달리기도 했다. 사흘이나 미뤄진 일정 때문에 취소될 숙소를 잡아 놓기 위해 일행보다 앞서 간 것. 호수에서 물안개가 올라오고 가는 비가 내리는데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죽음의 위협도 느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 그는 우비와 신발만 벗어던지고 잠에 빠져 들었다.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아우토반을 만났을 때의 성취감과 상쾌함. 여정을 함께한 인생 선배들은 “우리 인생살이의 단계단계를 짚어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사막에서 해가 뜨고 질 때, 아침 일찍 텐트 문을 들추었는데 수천 마리의 물소 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등 세상의 광대함을 경험한 것도 이번 여정의 수확이었다.


손영배 씨의 별명은 ‘태극기’. 오토바이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달려서였다. 안 그래도 험한 길에 태극기를 달고 달리자면 바람의 저항이 심해 균형 잡기가 어려웠지만, 그는 끝까지 태극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기상과 도전정신을 세계 곳곳에 휘날리고 싶었다. 이들은 보급용 트레일러에 자신들의 일정을 표시하는 지도를 붙이고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놀라워했다. “까레아(코리아), 까레아”라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든 금방 마음이 통했다.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로프스키, 키예프 등지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 라이더들이 미리 알고 나와 있었다. 그들은 시내 구경을 시켜 주거나 함께 야영하면서 밤새 지켜 주기도 했다. 떠날 때는 그 지역의 치한이나 마피아들이 두려웠는데, 오히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듬뿍 느낀 기회였다. 그들을 위협한 것은 열악한 길과 졸음. “졸면 죽어~”라고 서로 경계하며 달렸다. 오토바이를 보통 자유의 상징으로 생각하는데, 그 ‘자유’를 지키려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절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걸 더욱 절실히 깨달은 시간이었다.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는 정신 하나로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도전을 마무리한 그들. 그들에게는 이제 ‘무모한 도전’이란 없는 듯했다.●

사진 : 문지민
  •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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