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들, 왜 시에 빠질까?

글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
“삼십 분 있다가 계산대 앞에서 만나자.”
“네. 아빠.”

일요일 오후 아이들 참고서를 사러 교보문고에 들른 김 이사는 책 구경을 하러 돌아다니기로 했다. 보통 때 김 이사가 가는 코스는 이랬다. 먼저 경제신문 북 섹션에 소개된 책 중 기억에 남은 것을 보기 위해 경제경영과 자기개발 코너에 가서 훑어본다. 한두 권 집어 들고 난 다음에 취미인 골프와 등산 관련 잡지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왠지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다. 괜히 시집들이 보기 좋게 서 있는 코너에 발길을 멈추고 이리저리 들춰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쭈삣거리는 마음으로 심드렁한 척하고 한 권 쓱 집어 들었다. 그런데 웬걸? 옆 사람을 보니 김 이사 또래의 남자들이 시집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낯익은 시인의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경영서적의 밑바닥에 깔아 계산대에 내밀었다.

요즘 서점에 가면 이렇게 시집이나 문학서적을 읽는 중년 남성을 자주 본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의 소설가 김훈이 소설 읽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지만, 시집은 의외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 최근 일 년간의 시집 판매 패턴을 조사한 것에 따르면 10대 청소년에서는 1대 3의 비율로 여성이 월등히 많았다. 그렇지만 마흔다섯을 정점으로 역전되어 남성이 더 시집을 많이 사 읽기 시작하는데 예순이 넘으면 3대 1로 완전히 뒤바뀐다는 것. 도대체 시집이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일까?

분석심리학자 융은 중년을 ‘인생의 정오(noon of life)’라고 했다. 정오가 지난 다음부터는 앞을 보고 달려가기만 하던 청년기의 관성에서 벗어나 아래 세대에게 나눠 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인생의 의미에 더 집중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되어 있던 남자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 여자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중년이 되면 의식 위로 올라온다고 했다. 고전적인 성 역할에 변화가 오는 시기가 중년이라는 얘기다. 중년 이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도, 시집을 읽고 감수성이 충만해지는 남성이 늘어나는 것도 모두 이런 중년의 자연스러운 변화의 결과다.

그러므로 시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TV 드라마를 보다가 감동적인 장면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일에 당황하지 말자. 나약해지거나 우울증이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리어 모든 것을 이성과 논리로만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쟁취하고 성취하는 것만을 목표로 일방 직진만 하던 마음이 균형을 잡아 가려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결핍된 부분에 허기를 느끼면 그 빈 공간을 메우려 애쓰는 존재다. 이런 노력을 굳이 부인하려는 것은 피아노는 여자나 배우는 것이라며 태권도장만 다니는 초등학생의 억지나 다름없다.

나이 먹는다는 것은 변화를 수반한다. 그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적극적으로 넘어갈 때 한쪽으로 치우쳤던 인생이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그런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성숙한 중년을 달성하고 만족스러운 노년기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 서가 구석에 꽂혀 있는 먼지 쌓인 시집을 한 권 꺼내 들고 심드렁하게 읽어 보자. 마치 별것 아닌 일인 듯 말이다. 그리고 느껴 보자.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지, 뭉클한 것이 느껴지는지. 거기서부터 인생의 3막이 시작된다. 인생 4막 5장이고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다는 것,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 200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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