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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15) | 바위를 위하여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유난히 분주하고 고단했던 하루를 끝내고 나니, 원래도 가난한 사람이 도적떼까지 만나 알거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시간도둑, 마음도둑의 약탈이 특히 심했지요. 너덜너덜 남루가 된 채 도적떼 잔당들이 쫓아오기라도 하듯 꽁무니가 빠지게 숲골짜기 집으로 내달리는데, 그날따라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죄다 반대편 차선으로만 달리고 이맘때면 늘 함께 따라와 주던 달님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달려 봤자 숲골짜기 집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 같았지요. 눈 감고도 달릴 만큼 익숙한 길까지 의심하는 것을 깨닫고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부박한 마음이 자명한 진실마저 흐리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처마 밑 외등 빛이, 짖는 둥 마는 둥 개들의 게으른 인사가, 나직한 개울 물소리가, 그래서 더 반가웠을 겁니다. 무엇보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 곳곳을 누르고 있는 바위들이 미덥고 미더웠지요. 그 토템들은 우리가 흙벽돌집을 짓기 훨씬 전 오랜 옛날부터 그 자리에 살면서, 나 같은 사람이 겪는 부박한 마음의 풍랑 따윈 까맣게 모르는 존재들이지요.


숲골짜기 집의 앞뒤 뜰에는 그런 바위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표적이 될 만큼 큰 바위가 다섯. 두어 개는 몰래 파내어 가고, 흥정이 들어올 만큼 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 가족끼리 부르기로는 고사바위ㆍ호랑이바위ㆍ코끼리바위ㆍ이불바위ㆍ빨래바위라고 하는 것들이지요.

고사바위는 집 짓기 전부터 빈터를 지키고 있던 54년 묵은 낡은 흙집 바로 뒤,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만큼 커다란 너럭바위입니다. 그 집에 살았던 여러 세대가 신성시하며 고사를 지내곤 했는데, 우물 파러 왔던 바깥사람 하나가 그런 줄 모르고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가 입이 비뚤어졌다는 전설이 붙어 있습니다. 꼭 그 바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 줄 알면서도(어떤 바위에도 오래 몸을 대고 있으면 이런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친구들이 오면 자칫 그 위에 앉거나 오르내리지 않도록 그 이야기를 해주곤 합니다.

호랑이바위는 개울 건너 우씨 댁 할머니 덕분에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뜰에 나와 있는데 할머니가 지나가시다 아주 무서운 얘기를 하나 해주겠다고 하더랍니다.

“저 바위 말이우, 내가 60년 전에 저 바위 뒤에 있던 집으로 꽃가마 타고 시집을 왔더랬는데, 언젠가 밤중에 나왔다가… 그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호랑이를 만났다우. 아주, 눈이 번쩍번쩍하는 호랑이를 말이야… 어때, 무섭지?”

동물원에서나 호랑이를 만나 본 우리 가족은 새삼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한바탕 웃을 따름이지만, 이따금 이 바위 곁에 서면 갓 시집온 새댁이 호랑이와 맞닥뜨리는 장면이 떠올라 아주 잠깐 진저리치기도 합니다.

코끼리바위는 집터를 고르다가 포클레인에 걸리는 바람에 긴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꼭 코끼리가 기다란 코를 바닥에 늘어뜨리고 엎드린 형상이지요. 하지만 지금 모습은 빙산의 일각, 땅 속에 어떤 모습이 잠겨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초여름이 되면 이 바위 위로 하얀 찔레꽃이 넝쿨을 벋곤 하는데, 지난봄에는 시어머님이 심은 보랏빛 나팔꽃 덩굴이 함께 어우러져 화려한 기념물이 되었습니다.

이불바위는 앞마당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역시 집터를 고르다가 나온 건데, 몇몇이 꽤나 탐을 냈다고 합니다. 이 바위를 살리느라고 층층이 계단을 만들었는데 햇볕 좋은 날 이불을 널면 안성맞춤이지요.

빨래바위도 개울 한가운데를 절반쯤 가로지를 만큼 커다랗습니다. 대대세세 500년 동안 이 산골짜기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쓰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거의 비슷한 크기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이 큰 바위 둘을 동네 분이 포클레인으로 파내어 갔다가 동티 난다는 말에 되돌려 놓으면서, 하나를 빼놓고 오는 바람에 외톨이가 되었지요. 정말 바위를 건드린 댁의 안주인은 크게 앓아 입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위라는 토템의 신성을 얘기하기보다는 그 무궁 불변의 미덕을 닮고 싶습니다. 바슐라르가 말한 대로 잠시라도 바위 속에서 살아본다면, 우리는 수많은 약점을 잊을 수 있을런지요.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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