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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도서관 운동 펼치는 박영숙 느티나무도서관 관장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며 성장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곳, 참 편안하다. 아이들이 쉽게 빼서 볼 수 있도록 나지막한 책장들이 들어차 있고, 젖먹이가 기어 다닐 수 있는 마루방도 있다. 여기저기 놓인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엎드리거나 누워서 책을 볼 수도 있다. 책을 읽다 지루하면 원하는 DVD를 골라 소파에 앉아서 보기도 한다. 한쪽 구석에 놓인 피아노에는 “책 읽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해 주세요”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마음까지 포근해지는 곳, 할아버지와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칸막이 없이 어울리는 공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도서관이다.

2000년 2월, 수지구 풍덕천동 아파트 상가 지하 132㎡ 남짓한 공간에 문을 연 이 도서관은 지난해 11월 지상 3층 지하 1층의 건물을 지어 이사했다. 공간은 더 널찍하고 환해졌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나눔의 정신은 여전한 듯했다. 최근 일민문화상을 받은 박영숙 느티나무도서관 관장을 그곳에서 만났다.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에 다 풀린 파마머리, 자신을 꾸미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그와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선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토론을 하는 듯했다.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끼리 자연스레 모임이 형성된다고. 이곳은 다른 도서관과 달리 ‘정숙’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이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 박 관장은 지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반짝 손을 올려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장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수지로 이사와 새 아파트 1층에 전세를 살던 그는 집 살 돈이 생기자 내 집이 아닌 ‘모두의 집’을 찾아다녔다. 큰아이가 다섯 살, 둘째가 두 살 때였다. 원래 문을 열어 놓고 살아 그의 집은 이미 ‘동네 아지트’가 된 터였지만 누구든 머물다 갈 수 있는 ‘느티나무’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었다. 처음엔 마당 딸린 집을 찾았지만 그동안 수지 땅값이 많이 올라 상가 지하에 공간을 마련한 후 ‘사립문고’로 신고했다. 도서관이라면 아무나 부담 없이 올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둘째 아이를 업고 서점에서 하나하나 책을 고른 후 느티나무도서관 문을 열었다.

수지가 완전히 개발되기 전이라 가건물에 사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많을 때였다. 집에 가도 맞아 주는 이가 없는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을 찾았고 그는 기꺼이 이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머리를 감기기도 했다. 그렇다고 저소득층 아이들만 모여드는 곳은 아니었다. 아파트촌 아이들과 저소득층 아이들이 함께 책을 읽고, 그들의 엄마, 아빠도 즐겨 찾았다. 남녀노소가 읽을 책을 고루 갖춘 가족 도서관. 요즘은 아빠들이 주말에 찾아와 볕 좋은 장소에서 책을 읽다 낮잠에 빠져 들기도 한다. 도서관을 찾은 사람들은 그곳을 ‘우리의 공간’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빵을 구워 와 아이들에게 먹이고, 누구는 도서관을 청소하고 단장하는 일에 나섰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그림, 바느질, 요리를 가르쳐 주는 어른도 생겼다. 이곳에선 아이들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책에 비닐 씌우기와 제자리에 꽂기, 도서 대출, 청소 등 도서관 일을 도우며 자원활동가가 된다. 뭐든 잘 흘리고 다니는 그를 위해 물건을 찾아 주고 챙겨 주기도 한다.

아이들이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여기저기 자유롭게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남편인 이상규 인터파크 사장과 함께 내 집 마련 대신 도서관 지어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대학생 때부터의 꿈을 실현한 것. 서울대에서 소비자아동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그는 대학시절 상계동과 난지도 공부방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돌봤다. 상계동에 아파트촌이 들어서기 전이라 아이들 부모 중에는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곳 아이들의 꿈이 남자는 중기 기사가 되는 것이고, 여자는 함바집에서 심부름이라도 하게 셈은 할 줄 알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바깥세계를 모르는 거지요. 왜 이들에게는 꿈꿀 권리마저 없는지 안타까웠습니다.”

다르게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다른 꿈도 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공간을 꿈꿨고, 결혼 후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의 남편은 이상규 인터파크 사장이다. 모든 것을 내놓는 삶에 대해 가족들이 이해하느냐고 묻자 “그럼요. 남편은 저와 대학시절부터 ‘동지’인걸요. 생각은 똑같지만, 남편은 돈을 벌어 오고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역할 분담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지금도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집이 없다. 한때 집을 소유한 적도 있었지만, 도서관 짓는 비용을 대느라 다시 팔았다고 한다. 대신 도서관 바로 옆 아파트로 전세를 내어 들어왔다. 2003년 느티나무문화재단을 만들어 이제까지 투자한 것을 모두 재단 앞으로 돌려 놓았고, 남편은 이 재단의 이사로 매달 월급을 쪼개 회비를 낸다. 여기저기에 이런 도서관이 생겨나 마을 공동체가 살아나는 게 이들의 꿈. ‘도서관 친구’가 돼 이를 지원할 기업을 찾고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딸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후원자. ‘엄마를 다른 아이들에게 뺏겼다는 박탈감이 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아들과 딸이 차례로 엄마를 찾아 끌어안는데, 진한 애정과 신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아들은 유치원 다닐 나이에 도서관에서 일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쳤다. 이들 가족에게 지난해 셋째가 생겼다. 남자아이를 입양해 이제 18개월이라고.

“어릴 적 엄마 품에서 무조건적인 긍정을 받으며 자라지 못한 아이는 뭔가 해낼 힘을 갖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좌절을 보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남자아이는 특히 입양하는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했지요.”


아이를 입양한 후 “배도 아프지 않고 이런 아이를 얻다니, 세상에 이런 사기가 어디 있어?” 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첫째와 둘째는 “우리가 키워야지. 엄마를 어떻게 믿어?” 하며 동생 기저귀 갈고, 씻기고, 업어 재우기까지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뭔가 선물을 해준 것 같다. 이제 느티나무도서관의 장서는 2만6000권. 그는 “한 아이의 운명을 바꿔 놓을지도 모르는 책이니 제자리에 잘 꽂아 놓아야겠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이는 키우고 가르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자랄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데, 책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만 들여다보면 아이마다 각기 반짝거리는 게 있는데, 그걸 북돋워 주기만 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부모가 그걸 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 할 때 갈등이 생긴다고. 처음 도서관을 찾은 부모들에게 그는 “아이를 가르치려 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고요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자” 하며 함께 책을 읽었다. 그는 이 도서관에 다니는 아이들이 생기가 넘치고, 활기차고, 거침이 없다는 것에 가장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꾸 하고 싶은 게 많아진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을 때 제일 감동해요.”

어떤 환경에 있든 그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주처럼 소중한 듯했다.

사진 : 신규철
  • 200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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