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13) | 딸에게 준 선물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방학한 딸아이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따금 늦잠을 자곤 합니다. 숲 골짜기는 대낮같이 환하고, 커튼 없는 다락방 창으로 사정없이 햇살이 쏟아져 들면 이미 여덟 시도 넘은 아침…. 새벽 네 시 아니면 늦어도 다섯 시에는 일어나게끔 맞춰 놓은 시계 경보 장치들을 언제 어떻게 껐는지, 눈 뜬 그 순간부터 낭패감에 쩔쩔매곤 합니다. 늦게 잠들어도 원하는 때 맞춰 일어나 주는 몸만 믿고 넘치도록 일거리를 받아 안고 사는 내게 늦잠은 작지 않은 재앙이니까요. 그 낭패감 속에서 궁리궁리, ‘오늘 해야 할 일’ 몇 건을 덜어 내고 있는데 남편이 올라왔습니다.

“못 일어나네. 뒷산에 안 갈려?”

“가야지… 갈 거야…. 근데 기운이 없네. 거기, 내가 읽던 시집 있지? 거기서 한 편 골라 읽어 주면 힘이 날 것도 같은데.”


피식 웃으며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을 펴들고 남편은 하필 기나긴 연작시를 골라 읽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읽어 주는 바람에 하루의 시작은 돌이킬 수 없이 늦어졌습니다. 아마도 내 마음은 놓쳐 버린 시간이 아쉽다 못해 영영 손 놓아 버릴 속셈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딸아이를 깨우느라 또 한 박자 더 늦어진 아침 식탁에 둘러앉아 생각하니, 뒷산에 오르는 일이 오늘의 가장 중요한 계획으로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여태껏 시도했다가 실패한 주말의 도전… 딸아이와 함께 뒷산에 오르기의 욕심까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느릿느릿, 하염없이 꾸물대는 딸아이와 함께 움직인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결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딸도 뒷산에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내가 이렇게 운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거들고 나섰습니다.

“골짜기 숲 집으로 들어온 지 두 해가 지나도록 딸내미가 뒷산에 한 번 못 오르다니, 원.” “그러게… 원주 와서 처음엔 아빠랑 둘이서 치악산 영원산성에도 올라갔다 오고 그랬잖아. 여긴 힘 하나도 안 들어. 말 나온 김에 오늘은 꼭 함께 가자. 네가 보면 와, 소리칠 만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냐.”

무슨 말이, 무슨 기운이, 요지부동이던 그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딸아이가 등산화를 찾아 신는 걸 보니 가슴이 다 뛰었습니다. 더구나 새해 들어 첫 산행이었으니, 지금쯤 능선에 자리 잡고 앉았을 해며 나무며 억새며 바위에 딸아이를 일일이 인사시키고 싶었습니다.

마침 하늘은 티 한 점 없는 쪽빛이었습니다.

“이런 하늘, 나도 그려 낼 수 있는데….”

미대 지망생의 눈길은 그렇게 하늘이며 헐벗은 나무들이 까칠하게 그리는 능선을 더듬고, 역광의 햇살에 윤곽만 보스스한 억새를 담아 두느라 분주합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진짜 멋진 장면이 기다리고 있어.”

“우리 딸, 잘 걷는데… 하긴 산악 동아리 활동도 했으니!”

둘이서는 묵묵히 걷던 산길이 딸아이 덕분에 떠들썩합니다. 아마 숲도 바위도 그 흥분을 이해하겠지요. 가난뱅이 시인 소설가 부모가 정말 귀한 것이라 여기는 것을, 드디어 안겨 주게 된 기쁨 말입니다.

“와아, 저 커다란 게 뭐야?”

“응…, 원시인들이 둘러앉아 회의하던 돌 탁자쯤 되지 않을까 싶어.”

옛 채석장 터에 남아 있는 거대하게 네모진 돌덩어리를 처음 봤을 때, 그때의 느낌 그대로 너스레를 떠는 데도 딸아이는 “오버한다”며 코웃음 치지 않았습니다. 인적 드문 겨울 산골짜기 나무 한 그루이듯 자연에 섞이면서, 풍경 속에 겹겹이 쌓인 시간과 공간을 감지했기 때문일까요.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8년 0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11

201911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1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