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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12) | 무서리、무서리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새벽 산을 오르고 또 내려오자니,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무서리’가 또렷이 관념의 껍질을 벗고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엊그제 찬 바람 속에서도 꼿꼿이 은발을 나부끼던 억새가 ‘간밤에 저리 내린 무서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로 기대어 누운 채, 가으내 꿈인 듯 생시인 듯 웃고 있던 구절초며 묵묵한 바위와 함께 일제히 얼음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요. 대개 시의 감흥이란 실재와 관념이 겹을 이루는 터이지만, 이 무서리의 실재를 못 보았더라면 시인이 깨달은 그 엄습한 뼈저린 차가움이며, 그 형극의 절정이 도모한 개화(開花)의 뜨거움을 도저히 알 수 없었겠지요.

그렇게 집 뒷산 봉림산은 어느새 겨울이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인 듯한 웅덩이엔 살얼음이 살짝 덮였고, 자작나무가 껍질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모르겠던 산바람이 몹시도 부네.”

“나뭇잎이 다 떨어졌으니까.”

정말 건너편 숲이며 골짜기며 능선이 훤히 보이고, 그러느라 남김없이 떨어진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집니다. 다람쥐가 아니라도 그 낙엽의 늪 속에서는 누구도 도토리 밤을 찾아낼 수 없을 거예요. 그 대신 누구라도 자연이 감춰 놓은 선물을 뜻하지 않게 받고 기뻐하겠지요. 그러고도 남은 열매들은 새로이 태어나거나 낙엽과 함께 낱낱이 거름이 되어 숲을 기름지게 할 것입니다.

제 영역을 넓히느라 자꾸 길을 벗어나는 호돌이를 먹이로 꾀느라 남편은 뒤처지고, 텅 빈 숲 속을 서걱이는 내 발자국 소리에 문득 내가 놀라는데 푸드득, 갑자기 세찬 날갯짓 소리가 납니다. 잠깐 기억이 끊긴 듯이, 눈 멀 듯 마음 멀 듯이 그렇게 막막한 여백 뒤에야 꿩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오릅니다. 뒤쫓아 온 사람도 그걸 봤던 모양입니다.

“꿩인가 보다… 까투리? 장끼?”

“음… 알록달록했던 것 같애. 그러면 수꿩이니, 장끼네.”

그러고는 새삼 사방을 둘러보는데, 늘 물 한 모금 먹고 세수하는 계곡이 바로 옆으로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걸 가르쳐주느라 장끼가 풍경을 흔들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바로 거기잖아. 자… 지름길을 개척해 보자고.”

이렇게 산이 제 속을 다 드러내는 것도 이맘때 잠깐이겠지요. 이제 눈이 오면 또다시 분간 못할 미망의 시절이 닥칠 테니까요.

산골짜기에 살면 폭설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아니, 차라리 나갈 일이 없어 갇혀 있을 수 있다면 그 편이 나을 테지요. 아이 태우고 눈길을 운전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어깨가 뻣뻣해집니다. 집 뜰에 들어서자 내 얼굴에 떠오른 걱정을 지우자고, 남편이 일거리를 만듭니다. 호돌이를 묶어 놓고는 감나무 아래 꽃밭으로 가면서 소리칩니다.

“칸나 알뿌리, 지금 캐어다 건사해야 여름에 꽃 볼 수 있대. 거기 면장갑 있어.”

개울 건너 우씨 댁 할머니가 봉지 하나 담아 주신 알뿌리가 요란하게 꽃피고 지면서도 부지런히 번식해 커다란 채반 두 개에 담고도 남았습니다. 재미있게 생긴 알뿌리 모양을 서로 보여주며 웃느라 정말 눈 걱정은 까맣게 잊었지요. 허리 펴고 일어서다가는 주렁주렁 열린 채로 얼어 가는 감을 다섯 개 따서, 개 셋과 내외가 나눠 먹었습니다.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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