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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10) | 숲의 정령이 나눠 준 열매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단강리 숲골짜기는 밤나무 천지입니다. 나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밤꽃 필 무렵 마을로 들어서면 한눈에 커다란 밤나무가 많다는 걸 알아보곤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 집 마당에 잇닿은 개울가에 아주 커다란 밤나무가 있다는 걸 가을이 되고 나뭇가지마다 무성히 가시밤송이가 매달리고서야 깨닫곤 합니다. 이즈음 개울가를 지나온 식구들마다 득의만면 호주머니가 불룩한 건 다 이 밤나무 덕분이에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그까짓 밤톨 몇 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알밤의 가치를 따지기보다 이제 막 밤송이 속에서 굴러 나온 듯 흠 없이 반들거리는 자연물을 얻어 갖는 기쁨이란 무엇에 비할 바 없이 각별합니다.


지난 가을엔 이 밤과 밭에서 캔 고구마 찐 걸로 점심 한 끼 너끈히 때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일찌감치 바깥사람들이 이 개울가 밤나무를 깨끗이 털어갔어요. 어느 휴일 아침 개울가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주방 창으로 내다보니 서넛이 밤을 털고 줍고 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바깥사람들이 손을 대면 남아나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자주 올 수 없으니 그렇게들 깡그리 쓸어가는 거지요.

“옥수수는 너구리가 다 파먹고 잣나무는 청설모들이 다 갉아먹고 밤나무는 또 저렇게 털어가네. 온 골짜기가 밤나무건만, 하필….”

우리 집 마당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다 우리 것이라 할 순 없지만,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이럴 때 감때사나운 마을 할머니라도 좀 나서서 쫓아내 줬으면 하는 못난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별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남편이 “어디 보자, 저것도 밤나무 같은데…” 하고 나가더니 텃밭 한쪽에 밀림인 듯 우거진 덤불 위쪽을 가리켰습니다. 정말, 가만 보니 칡덩굴에 친친 감긴 나무 한 그루가 가시 밤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지요.

“어 정말이네, 밤나무가 또 있네! 가봅시다!”

내외가 보란 듯이 밤 한번 주워 볼 생각으로 소쿠리를 챙겨 들고 막 덤불로 들어섰을 때예요. 웽, 하고 벌떼가 날아오르고 앞장섰던 남편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어요. 당장 목덜미 한 군데가 예사롭지 않게 부풀어 오르고 침을 뽑는다, 된장을 바른다, 법석을 떨었지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빼앗긴 나무’와 ‘금단의 나무’를 바라보던 남편은 봄에 나무시장 서면 밤나무 한 그루 사다 심으리라,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인가, 다음다음인가 휴일 새벽에 남편은 여느 때처럼 “산에 갑시다” 하지 않고 “밤 주우러 갑시다” 했습니다. 강아지 호돌이를 목줄 풀어 내달리게 하면서 뒷숲으로 올라가는데 벌써 산길 양쪽이 밤투성이였지요. 밤 주우러 가자고는 했지만, 그보다는 나를 움직여 운동하게 할 목적으로 깨웠던지 더 크고 좋은 밤 있는 데로 가자며 자꾸 걸음을 재촉했어요. 결국, 오래전에 채석장이었다는 돌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야 밤 줍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아,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습니다. ‘숲 속에서 밤 줍기’라는 건 멋진 일이니 꼭 해보시라고. 서늘한 숲 내음을 들이키며 일찌감치 떨어져 쌓인 낙엽 사이로 밤을 줍노라면 금세 까마득히 오랜 옛날 수렵 채취 시절 사람이 됩니다. 딱 며칠 먹을 만큼 주워 갖는 것만으로 풍족한 삶, 저장하거나 확보할 재간이 없는 단순한 삶, 그래서 모두가 똑같이 조촐한 삶, 오늘 하루의 일과 생각과 먹을거리에 열렬히 집중된 삶, 그 주인공 말이지요. 또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개암 줍는 아이’처럼 나눠 먹을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며 새삼 애틋한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 형제며 스승과 이웃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문득 지나치게 열심을 부리다가 다람쥐 이빨 자국이 선연한 밤을 발견하고서야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그 초식동물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가시밤송이를 발로 밟아 헤집다가 밤나무의 눈길을 느끼고 주춤거리거나, 어디에선가 보고 있을 숲의 정령을 의식하다가 발을 헛디딜 때도 있습니다. 그래저래, 이제 내게는 밤이 계절 과실이라기보다는 ‘숲의 정령이 나눠 준 열매’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원재길 이상희 부부와 딸 새록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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