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9) | 폭우 속에 온 강아지들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아침부터 내리는 보슬비가 점심때가 지나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 하늘에서 비구름을 일삼아 곱게 곱게 체를 치는 듯, 이름 그대로 보슬보슬 내립니다. 창 너머로 보기에는 감쪽같이 개인 터여서 마음 놓고 뜰에 강아지 보러 나갔던 식구들은 ‘또 비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보슬비 쪽에서 들으면 ‘이렇게 살금살금 내리는데도!’ 하고 서운해 할지 모르지만, 여름 내내 이 숲 골짜기 집이 얼마나 쉴 새 없이 폭우에 시달렸는지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사나흘 걸러 개울물이 뜰로 넘쳐흐르고 지하수 자아올리는 모터가 잠기는 바람에 남편 홀로 장대비를 맞아 가며 수습하느라 고생이 컸습니다. 번개 벼락에 인터넷은 끊기고 전화 상태도 시원치 않아서, 딸아이와 나 둘 다 시내에 나가 있는 날이면 남편은 황망히 고립감에 빠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와중에 진돗개 알로가 흰둥이 누렁이 둘을 낳았더랬습니다. 곰돌이 형제자매들 낳은 지 두 해도 훨씬 넘은 출산이지요. 사실 우린 그동안 개울 건너 권이장 댁 건달 개가 얼씬대는 걸 한사코 쫓아 버리곤 했어요. 숲 골짜기 위아래 마을 암캐들을 다 찝쩍대고 돌아다닌다고 소문난 녀석이라 그러기도 했지만, 한 배 낳고 난 뒤로 알로가 눈에 띄게 쇠약해진 게 마음 편치 않아서였지요. 딸아이가 강아지 타령할 때마다 타이를 수밖에 없었어요.

“강아지 귀엽다고 자꾸 낳게 하는 건 어미 개한테 못할 짓이야. 잘 먹이고 돌보는 것도 쉽지 않아. 지금 있는 두 녀석 밥 챙기는 것도 예삿 일이 아니잖아.”

그러긴 했어도 강아지들의 탄생은 폭우가 할퀴어 대는 나날을 모처럼 반짝이게 해준 경사였어요. 세 식구는 틈만 나면 우산을 쓴 채 개집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밤새 별 탈 없이 잘 잤는지 확인하느라, 이름 짓느라, 한번 쓰다듬어볼 기회를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남편이 알로를 밥그릇으로 유인한 사이에 딸아이와 내가 개집 안으로 한껏 팔을 뻗어 재빨리 살짝 한번 만져 보고 마는 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조그만 생명체들이 내뿜는 광휘는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근심 걱정에 휘둘리던 일상이 개집 앞에서 잠깐 신비와 경이를 되찾은 셈이랄까요. 외동이 딸아이가 등굣길이 바쁜 아침에도 개집 안을 엿보며 ‘쭛쭛 쭛쭛… 아, 귀여워! 진짜 귀여워!’ 하고 제 동생들이나 되는 듯 살갑게 어르며 탄성을 내지를 때면 코끝이 시큰하곤 했습니다. 원래부터 예민한 알로가 새로이 어미 노릇을 하느라 더 예민해져 부산떠는 모습이며, 태어난 그자리에서 붙박이로 자란 곰돌이가 고물고물 기어오르는 아우뻘 강아지들을 자기도 모르게 해치게 될까 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쩔쩔매는 모습도 마음 짠했지요. 하루가 다르게 쑥쑥 몸이 크는 것 못지않게 동작이 빨라지고 대담해지는 것도 신기했고, 한배에서 나온 녀석들의 생김새와 기질이 완연히 서로 다른 것도 놀랍기만 했습니다.

한 주간 너머 눈도 못 뜨고 어미 집 한쪽 구석에서 엎치락뒤치락 낑낑거리던 강아지들이 어느새 발맘발맘 기어 나와 덤불을 헤치고 킁킁거리며 나아갔다 물러섰다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는 걸 보면 마치 우리 인생 같다고 여겨지곤 했습니다. 세상을 다 맛보려는 듯 풀잎이며 나무 밑동을 핥아 보고 바위를 깨물어 보고 벌레를 건드려 보는 모습, 계단을 오르다 주르륵 미끄러지고는 다시 올라가서 의기양양 양옆을 돌아보는 모습, 축대 위에서 뛰어내리려다 말고 황급히 뒷걸음질치는 모습,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집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은 이제 벌써 시간의 물살에 밀려가고 있지요. 지금 저렇게 쪼끄만 귀를 펄럭이며 뜰을 내달리는 두 녀석 중 하양이는 개울 건너 소라네로 보낼 참이고, 호돌이는 어미 집을 떠나 방울 목걸이를 한 채 새로 마련한 제 집에 묶일 참입니다. ‘개 풀어 기르기’가 소원인 내게는 참으로 끔찍한 시간이 다가온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묶여 사는 개들 편에서 보자면 네 활개 치고 다니는 개의 자유가 그대로 상처가 될 테니까요. 폭우 멈추자마자 바람이 차갑고, 강아지들은 뛰어놀자마자 묶이거나 떠나갑니다.
원재길 이상희 부부와 딸 새록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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