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8) | 너무 많은 채소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이즈음엔 밥 먹을 때가 되면 으레 양푼을 들고 채소밭으로 갑니다. 상추 쑥갓 아욱 겨자 풋고추를 조금씩 골고루 뜯고 따고, 호박이나 오이가 마침 먹을 만하게 자란 게 눈에 띄면 그것도 땁니다. 집 뜰에서 가꾼 푸성귀의 미덕은 무엇보다 한 번만 물에 씻고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는 데 있지요. 풍덩풍덩 씻어 건져서 대충 손으로 잘라 놓고, 호박은 숭숭 썰어 된장국 끓이고, 오이 썰어 고추랑 접시에 수북이 담아 놓으면 식탁이 그야말로 ‘푸른 들판’이지요. 대접에다 밥 퍼 담고 제각기 양에 맞춰 채소 넣고 고추장 참기름 깨소금 넣어 비벼 먹는 야채 비빔밥과 된장국이 얼마나 맛난지 모릅니다. 내외는 물리는 법도 없이 희희낙락 끼니마다 ‘푸른 들판’을 즐기는데, 딸아이는 입을 쑥 내밀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듭니다.

“어휴, 또야!”

“얘는! 이게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예뻐지는 데도 도움이 될 걸?”

“그럼… 섬유질이 많아서 배도 쑥 들어가고….”


볼이 미어져라 쩝쩝거리는 틈틈이 남편과 내가 그런 말을 늘어놓아 보지만, 딸아이 귀에는 끔찍하게 따분한 억지로나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한 숟가락 겨우 떠서 우물거리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숟가락 우물거리다 물 한 모금…, 소리 없는 항의가 우렁찹니다. ‘한두 번이라야지, 채소 좋아하는 두 분이나 실컷 드세요. 나는 질렸다고요!’

하긴 너무 자주 먹긴 했습니다. 내 집 뜰에서 자란 게 대견해서도 먹고, 뜯어도 뜯어도 빽빽이 자라는 채소가 아까워서도 먹고, 날로 쌈 싸서 먹고 비빔밥에 넣어 먹고 샐러드로 먹고, 국 끓여서 먹고, 살짝 데쳐 나물 무쳐서 먹고, 부침개 해서 먹고, 먹고, 먹고….

문득 어릴 때 생각이 났습니다. 이맘때 대문 양쪽 담장에는 상추밭 열무밭이 초록 띠를 드리웠더랬습니다. 훤칠하게 잘생긴 아버지는 일찌감치 귀가한 날이면 막내인 나에게 소쿠리를 들리곤 그 손바닥만 한 농장을 즐거이 돌봤지요. 돌 골라내고 물 주고 잡풀 뽑아내고, 그런 다음엔 빽빽하게 자란 상추 열무를 솎아 골목 안 이웃들과 나누었습니다. 당연히 여름 한철 우리 집 밥상엔 빠짐없이 야채 접시가 올랐는데, 어머니가 만날 ‘이다음에 생선 도가에 시집가거라’ 하실 정도로 생선을 밝히던 나는 야채도 생선이 있어야 손대곤 했어요. 갈치 조기 고등어 구이며 조림을 밥이랑 함께 상추에 싸서 먹으면 그토록 줄지 않던 밥이 어느새 한 그릇 말끔히 비워지곤 했더랬습니다.

추억의 지혜에 힘입어 딸아이 앞의 ‘푸른 들판’에 이런저런 고기류 접시를 놓아 주고서야 진정한 식탁 평화를 이루었습니다만, 그러고도 채소밭과 관련해 얼마간 떳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무성히 자라는 채소를 어릴 적 우리 아버지처럼 이웃들과 나눠 알뜰히 소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지요. 고랑고랑 그득히 자라는 걸 보면, 풍족도 가난 못지않게 괴로움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숲 골짜기 이웃들은 집집마다 채소밭이 있으니 그렇고, 원주 시내 이웃들은 일부러 그걸 전하러 나가지 않는 이상 나눠 줄 방법이 마땅찮습니다. 어쩌다 놀러 오는 이들도 뜯어 가고, 요행히 아이들 학교 실어 나를 때 가지고 나가 나누기도 하지만 그 ‘수요’만으로는 채소밭의 왕성한 ‘공급’을 감당하기 힘든 거지요. 중얼중얼, 그런 맥락으로 혼잣말을 하는데 토마토 가지를 손보던 남편이 말합니다.

“그래도 지난해보다는 한결 나은데, 뭘. 멋모르고 잔뜩 씨 뿌렸다가 혼났잖아…. 참, 내가 그 얘기 했던가? 흰 장화 할아버지 초상 때 문상객들이 상추밭 결딴 낸 이야기….”

얼마 전, 우리 진돗개 2세들 가운데 하나인 흰 장화(발목만 하얀 녀석이지요)를 데려다 키우던 마을 노인이 세상 떠났는데, 멀리서 온 문상객들한테 이웃 노인이 인심 쓰시기를 “요 밑에 있는 상추밭에서 상추나 좀 뜯어 가시구랴” 했더랍니다. 나중에 전세버스 나가고 보니 그 무성했던 상추밭이 휑뎅그렁, 식구들 먹을 것도 없이 뿌리째 깡그리들 뽑아가셨답니다.
원재길 이상희 부부와 딸 새록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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