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단상집 낸 뮤지컬 배우 카이

홀로 버티는 연약한 것들을 위하여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EMK컴퍼니·카이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그런 배우가 되겠습니다.”

2012년 〈두 도시 이야기〉로 한국뮤지컬대상 신인남우상을 받은 카이의 수상 소감이다. 2021년 그가 펴낸 단상집 《예쁘다, 너》를 보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 알 수 있다. 스쳐 가는 바람에도, 응달에 핀 꽃에도 그는 마음을 다해 반응한다. 진정 좋은 연기란 “액션이 아닌 리액션”이라는 경구를 가져다 쓰지 않아도 몸에 밴 정성스러운 반응이다.

뮤지컬 배우 카이의 소리는 직선보다는 곡선에 가깝다. 최단거리로 곧게 날아와 귀에 박히는 돌 같은 직구가 아니라, 포물선을 그리며 다가와 심장에 연착륙한다. 그의 소리가 궤도를 그리는 동안 그 안에 숨겨진 호흡도 함께 와 닿는다.


카이는 성악과를 졸업한 팝페라 가수 1세대다.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이 동시대의 노래를 부르면 어떤 공명이 생기는지 카이의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전향의 과정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1981년생 카이의 이름은 정기열, 서울예고를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재능도 성실함도 남다른 학생이었다. 서울대 성악과 재학 중이던 2002년 줄리아드 음대에서 수학할 기회를 얻었다. “가보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어머니는 뉴욕의 물가와 학비를 헤아린 뒤 “미안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슬펐다. 세계적인 오페라극장에 서는 성악가가 될 날만을 꿈꾸며 달려온 길이었다. 오페라 가수가 아닌 팝페라 가수로 전향할 때 이유를 묻던 어머니에게 그가 한 말은 하나였다.

“엄마, 호강시켜주고 싶어서.”



“고백한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 때
복권을 사러 갑니다.
기적이란 기대만큼 절대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으려고요.”
- 〈복권〉 -



성악을 향한 지극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뜻밖의 운명으로 뮤지컬과의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제가 2011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는데요. 뮤지컬은 저의 인생에 취미이자 특기가 됐습니다. 그 어떤 것도 뮤지컬을 하는 순간만큼 기쁜 희열이 없어서요. 저는 성악을 전공해서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을 행복해하는 사람이라, 이 모든 것이 포함된 뮤지컬이라는 장르만큼 ‘나’라는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무대가 없다고 믿어요. 현재도 뮤지컬 배우로 살고 있는 저 자신이 매우 흡족하고 감사하고 충만합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카이는 늘 메모 도구를 들고 다닌다. 필통에는 연필과 손바닥만 한 종이가 들어 있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의 마음에 잔상을 남긴 부분은 적어두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깊어지면 긴 글을 쓴다. 긴 글은 다시 짧은 글로 다듬어진다. 그가 책에 담은 글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것들이다. 가끔은 셔터도 누른다. 단상집에는 짧은 글들과 함께 작은 풍경이 담겼다. 그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풍경이란 들풀과 들꽃, 그림자와 담벼락, 잎사귀의 결 같은 것들이다.

“저는 가장 연약한 순간의 자연의 모습을 보면 셔터를 누르고 싶어집니다. 꽃들이 활짝 만개해서 아름다움을 만발하고 있는 모습보다는 어딘가에 홀로 떨어져서 열심으로 버텨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꼭 카메라에 담아두고 싶어져요. 푸르른 잎사귀를 찍는다 하면 뭔가 대단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서가 아니라, 흔하게 널려 있어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셔터를 누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어? 쟤 왜 나 같지?’ 싶을 때 셔터를 누르게 되는 것 같아요.”

뮤지컬 〈벤허〉와 〈엑스칼리버〉는 카이가 초연부터 함께한 푸른 잎사귀 같은 작품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첫 주연을 맡은 〈팬텀〉과 함께 이 세 작품을 자신의 ‘인생작’으로 꼽는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치열하게 몸을 만들어 무대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게 최선을 다해서 무대에 섰다. 실제로 〈벤허〉를 공연하던 중에는 몸싸움을 벌이다 마이크가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로 극장을 가득 채웠다. 그의 성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냥 문고리 하나쯤의 존재 되어
새 세상 활짝 여는 한 부분이 되고 싶다.
나의 노래 그 정도면 좋겠다.”
- 〈문고리〉 -

그가 다짐하는 것 중 하나는 무대 위에서는 주인공으로 살더라도 무대 아래에서는 다른 태도로 살자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작품의 것, 관객의 것인 ‘카이’ 그가 사인할 때 쓰는 ‘Your 카이’로 살다가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지면 정기열로 돌아온다. 스스로에게도 말한다.

“주인공인 것은, 무대 위에서로 족하다.”

“시의 완성은 글쓴이의 마침표가 아닌 읽는 사람의 때라고 한 시에 적어 넣었는데요. 마치 그것처럼 제가 아무리 좋은 노래, 좋은 글을 적으려고 노력해도 완성은 읽는 이의 몫인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카이로서 존재한다’라는 의미는 나 스스로 더욱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고 명확해지고 선명해지는 모습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더욱 그러한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을 거라는 겁니다.”

카이는 꽃 SNS와 클래식 유튜브도 운영 중이다. ‘꽃카이’ 인스타그램에는 그가 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올려두고, ‘카이 클래식’ 유튜브에는 도서관에 논문을 하나씩 채록하듯 클래식 이야기를 담아놓는다. 그에게 ‘꽃’은 꽃 그 자체이기도 하고, 자신이기도 하고 상대방이기도 하다. 그는 단상집에서 “벌로 태어나 꽃의 위만 보지 않아서, 개미로 태어나 꽃의 아래만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글을 적기도 했다. 한 면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은유이기도 하다.

“위에서 볼 때, 옆에서 볼 때, 아래서 볼 때, 꽃의 형상이 모두 다르잖아요. 특히 튤립이 그런 것 같습니다. ‘튤립’ 하면 떠오르는 형상은 옆모습일 뿐이죠. 어쩌면 그게 튤립을 형상하는 가장 정확하고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튤립을 위에서 바라본다든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튤립의 모습과 색깔 그리고 자라온 과정을 상상하며 볼 수 있거든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 스스로를 볼 때도,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단면만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클래식은 그의 과거이자 미래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가득 채운 클래식의 수련이 없었더라면 현재도, 미래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만큼 정확한 미래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일어난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를 잊는다면 미래로 가지 못해요. 클래식이라는 음악은 아주 오래된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과거의 전유물일 수 있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없었다면 BTS도 없었을 거예요. 미래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더욱더 과거에서 해법과 명확한 힌트를 얻어야 하죠.”


“나의 삶을 체로 탁탁 털어내면
시와 음악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기도〉 -



카이는 바쁜 스케줄이 있더라도 아침과 저녁에는 꼭 산책을 나가려고 한다. 무대에서 피땀 눈물을 흘린 뒤 휴식의 시간을 가지려나 싶은데, 그에게는 그 시간이 배우로서의 약속이자 책임감이다.

“뮤지컬 배우는 마음과 머릿속에 아름다운 정서의 향기가 돌지 않으면 스스로의 가치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오롯이 나의 감수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반드시 마련해야 하죠. 해가 중천에 뜨기 전, 그리고 해가 다 져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질 때쯤 저는 산책을 나와요. 내 마음이 잘 보이지 않을 때 꽃과 나무와 풀과 바람과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많은 것들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그곳에서 내 마음을 찾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흔들림을 보고, 그럼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열심을 보며 또 마음을 다잡는다. 이미 뮤지컬 배우로 10년을 살았고, 매일 적어둔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펴냈는데도 여전히 그는 ‘나를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는 일어나 걸을 것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카이의 1분 1초는 내일도 그렇게 흐른다.
  • 2021년 08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