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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진기주

빼곡한 미완의 이력서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티빙·CJ ENM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 전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을 바꿔가는 경향이 강하다면, 후자는 현실 가능한 범위에서 목표를 세우는 경우가 많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보다 능동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현실을 바꾸는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으니까.

배우 진기주는 분명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좇는 현실을 쟁취했을 때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이미 이룬 것을 버릴 줄 알았다. 스물일곱, 다소 늦은 감 있는 나이에 데뷔하기까지 그는 여러 차례 얻었고, 버렸다. 그 시간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치열했다.

“종종 엄친딸로 소개되는데 솔직히 낯부끄러워요. 저 역시 주변 엄친딸 때문에 학창 시절이 힘들었는걸요. ‘누구 딸은 어떻다더라’ 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어요. 저는 엄친딸도 아니고 되고 싶지도 않아요.”

대학생 진기주는 여느 또래처럼 스펙을 쌓고 무수히도 많은 곳에 취업 원서를 냈다. 결국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삼성SDS에 들어갔다. 주변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인으로 보였지만 정작 속내는 복잡했다. 직장 생활 3년 차, 쉴 틈 없이 달리던 생활에 균열이 생겼다. 10년, 20년 뒤를 떠올렸을 때 밝은 내가 보이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했다. 취업준비생 시절 숨 막히던 고통이 떠올랐지만 훗날 있을 후회보다 나아 보였다.

호기롭게 회사를 나와 취업을 준비하던 친구들과 함께 얼떨결에 원서를 썼다. 언론인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자 직군에 지원했다. G1 강원민방 방송기자가 됐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꿈틀댔다. 그는 다시 사직서를 냈다. 이번에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필요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연기였다. 진기주는 슈퍼모델선발대회를 발판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한 번 이루기도 힘든 이력이 여러 차례 더해지자 그에게는 ‘엄친딸’ ‘신입만 n번’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어떤 배역이든 착 녹아드는 연기


연기자가 되어 배역을 얻기 위해 숱하게 오디션을 봤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기회가 찾아온 건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이었다. 스무 살로 되돌아간 최지우(하노라)의 대학 동기 역할이었다. 작은 배역이지만 연기자의 길을 열어준 작품이었다. 이후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미스티〉 〈이리와 안아줘〉 〈초면에 사랑합니다〉 〈오! 삼광빌라!〉 등에 단역, 주·조연 가리지 않고 출연해 이름을 알려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김태리·류준열의 고향 친구 ‘은숙’으로 등장해 사계절 자연 속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진짜 친구처럼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저는 뭔가를 입혔을 때 그대로 입는 배우 같아요. 경미(영화 〈미드나이트〉)를 입어도, 은숙이(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입어도, 세상 도도하고 도시적인 한지원(드라마 〈미스티〉)을 입어도 이질감 없는 느낌이죠. 그런 게 저의 장점 아닐까요? 저는 그런 점을 좋게 생각해요.”

〈미드나이트〉는 진기주가 ‘이제 진짜 배우구나’를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이리와 안아줘〉를 찍을 때만 해도 연기하는 스스로가 어색했고 〈초면에 사랑합니다〉에서는 많이 성장했다고 느끼면서도 뭔가 덜 채워진 기분이었다. 〈미드나이트〉는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로 책임지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흠뻑 빠져 집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연기하면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편이었어요. 감독님이 ‘오케이’ 하면 왜 오케이 하냐고 물었으니까요. 〈오! 삼광빌라!〉를 할 때도 그랬어요. 촬영 전 대본을 해석하고 메모하고 기억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즉흥적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한 번에 오케이가 나면 불안해요. 자꾸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드나이트〉를 하면서 조금은 제 연기를 믿게 된 것 같아요.”


소리 없는 세상 속 격렬한 외침

진기주는 영화 〈미드나이트〉에서 연쇄살인마의 타깃이 된 경미를 연기했다.
청각장애를 가진 경미는 살인마의 발소리를 들을 수도,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미드나이트〉는 추격 스릴러 영화다. 청각장애를 가진 ‘경미’가 귀가하던 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도와주려다 연쇄살인마의 새로운 타깃이 되는 이야기다. 살인마의 발소리를 들을 수도,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진기주는 경미가 되어 번뜩이는 기지와 순발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는 주도적인 면모를 보인다. 쫓기는 역할 특성상 유독 달리는 장면이 많은데 죽기 살기로 뛰는 그 모습이 절로 주먹을 꽉 쥐게 만든다.

“촬영 전 ‘내가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자’고 정해뒀어요. ‘소리 없는 세상에 사니까 얼마나 무섭겠어’라고 생각하는 건 다분히 청인의 입장이에요. 소리는 갑자기 없어진 게 아닐 테니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 달랐죠.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그대로 옮겨와 스릴러로 표현하는 게 저의 목표였어요.”

진기주는 촬영 전 수어를 익히면서 소리 없는 농인들의 세상을 느꼈다. 또 일상의 소리를 무시하는 연습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주변 소음을 가급적 누른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주변에서 우당탕 싸우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농인의 세상을 경험하면서 보이지 않는 단절도 절감했다. 특히 범죄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장면 곳곳에서 갑갑함은 배가됐다. 수어로 표현하는 그 앞에서 상대방이 당황하고 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들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답답한 감정이 쌓여 현장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진기주는 일상에서 농인을 만날 경우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스럽더라도 한 번쯤은 들으려고 노력해주길” 당부했다.


더 이상의 신입 생활은 없다!


이제 연기는 그가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 됐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서일까. 의욕이 충만하다. 불안정하고 상처받는 일도 많았지만 여전히 흥미롭다. 지난 6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 더 이상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를 다니며 안정적인 일을 할 때보다 마음이 가볍다.

“아직 배우로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아쉬움도 많고 성에 차지 않는 점도 있지만 좋은걸요.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런가 봐요. 이런저런 욕심은 점차 채워가야겠죠. 지금은 연기자로 뭐든 하고 싶어요.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작품을 더 만나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아요.”

바깥 사람들의 박수보다 자기 내면의 만족을 위해 몇 번이고 출발점에 서는 용기. 진기주는 꿈을 향해 현실을 바꿔가는 가장 보통의 방법을 취했다. 생각대로 살기로 하고, 과감히 실천했다. 이제 진기주에게 더 이상의 신입 생활은 없을 것 같다. 간절히 원하던 곳에서 자신을 마음껏 발산하는 일만 남았을 뿐.
  •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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