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연기 달인 정우

옆집 사는 형인가?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리틀빅픽처스 

잠시 떠올려보자. 추리닝 바람으로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과자 부스러기를 집 안 곳곳에 날리다가 엄마에게 강력한 등짝 스매싱을 맞아도 ‘으허허허’ 웃고 있을 것 같은 형. 혹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리며 동네 오만 참견은 다 하고 다닐 것 같은 오빠. 혀를 끌끌 차게 만들면서도 왠지 모를 친숙함.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좋은 그 얼굴에 정우가 대입된다.

배우 정우에게는 곧잘 생활 연기란 말이 따라 붙는다. 보통 배우들이 “액션!” 소리에 맞춰 특정 장면의 연기를 시작한다면, 정우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을 비추는 관찰카메라 분위기를 연출한다. 연기 속에 삶의 행간을 채우는 걸까.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에 보고 있다 보면 ‘저런 사람 어디서 봤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이내 그 인물에 감정이 이입된다.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연기지만 정작 정우는 덤덤하다.

“대사를 볼 때 ‘나라면 어떻게 말할까’ 생각해요. 상황에 맞게 스토리를 덮는 거죠. 제 안에 있는 무수한 경험을 떠올려요. 감정적으로 부담되는 장면이 있으면 허들 뛰어넘듯 한 고비 한 고비 넘기죠. 그런 면을 생활 연기라고 봐주는 거 같아요. 딱히 비결은 없어요. 입에 붙을 때까지 계속 대사 연습을 할 뿐이죠.”


껄렁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연기의 중고 신인

정우는 영화 〈7인의 새벽〉으로 2001년 연기를 시작했다. 데뷔 후에도 무명의 시간은 길었다. 그는 2009년에야 영화 〈바람〉으로 주목받게 됐다. 엄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모 속을 썩이며 부산 뒷골목을 배회하던 고등학생의 성장기. 영화는 정우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때문에 정우는 어느 때보다 극에 깊이 녹아들며 배우가 배역과 하나 되는 맛을 여실히 체감했다.

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됐음에도 입소문을 타고 재개봉에 들어갔고 정우에게는 대종상 신인남우상의 영예를 안겼다. 이후 탄탄대로일 줄 알았는데 〈라이터를 켜라〉 〈품행제로〉 〈그때 그 사람들〉 등의 연기는 대중에게 굵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웬만한 업계 관계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실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쓰레기’로 등장한 정우가 벼락스타로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실상은 산전수전 다 겪은 중고 신인이었지만. 이때 그의 연기는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하숙집에 기거하며 백수같이 사는 쓰레기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다. 특히 귀에 착착 감기는 부산 사투리와 껄렁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연기는 드라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어렵게 만들었다. 신인상을 차지하고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정우가 비로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아낸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쎄시봉〉의 오근태, 〈히말라야〉의 박무택, 〈재심〉의 이준영 등으로 갖고 있던 또 다른 매력들을 꺼내 보였다.


편한 연기? 작품마다 발버둥 친다


최근 소식을 알려온 건 영화 〈이웃사촌〉을 통해서다. 영화의 배경은 1985년. 골목길의 간판, 우유병, 재래식 변소 등의 장치가 레트로 감성을 소환한다. 옆집에서 끓이는 찌개 냄새가 코끝에 닿고, TV를 보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담벼락을 타고 전해지던 그 시절. 정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도 그런 동네였다.

“영화를 찍으면서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고요. 보글보글이나 갤러그 게임 하던 것도 생각나고. 이웃집 담벼락은 발로 건널 수 있을 만큼 가까웠어요. 전 남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는데 가수 현진영을 너무 좋아해서 춤도 곧잘 따라 했죠.”

영화에서 정우가 맡은 역할은 도청팀장 유대권. 자택 격리 중인 정치인 이의식(오달수) 가족을 감시하기 위해 옆집에 위장 이사 온 인물이다. 평범한 이웃인 척 이의식과 옥상에서 담뱃불을 주고받고 삶은 감자를 나눠주기도 하며 그 시절 감성을 영화 곳곳에 심었다. 정체가 탄로 나지 않게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영화 속 상황인데, 실제 내 옆집에 저런 인물이 있어도 의심할 수 있을까 싶게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이웃 주민에게 감화되어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도리를 발견하며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종종 연기를 편하게 한다는 말을 들어요. 사실은 반대예요. 발버둥 치고 발악하면서 연기를 하는 편이에요. 작품마다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애써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빨래처럼 연기하죠. 빨래를 탁탁 털면 개운한 것처럼 촬영이 끝나면 녹초가 돼도 개운해요.”

밤낮으로 옆집을 도청하며 잠이 부족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푸석푸석한 피부와 충혈된 눈으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누런 통닭 봉투를 얼굴에 쓰고 발가벗은 채 도로를 달리는 장면에서는 각성한 소시민을 그리기 위해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을 살짝 내려놓기도 했다.

그는 영화 속 특별한 상황을 누군가의 실생활로 만들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금세 친숙하게 만드는 흡인력까지 갖고 있다. 정우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큰 자산이 있다. 배우의 길을 걸으면서도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관찰할 수 있었던 긴 무명의 시간이 오히려 힘이 됐으니까. 그 시간 동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축적해온 경험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무수한 배경이 되어 그의 세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걷는다. 동네를 뱅뱅 돌고 뒷산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요즘은 한강을 두 시간씩 걷곤 한다. 길을 가다가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돌아보길. 이웃사촌 정우가 당신 곁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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