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셰프 '르꼬숑' 정상원 下

특별한 날, 특별한 기억을...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첫 경험이었다. 음식을 통해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고, 기억과 경험이 물밀듯 왕창 소환되는 느낌은.
‘음식은 곧 문화’라는 명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상원 셰프의 식탁을 경험하면서 이 평범한 명제의 진의를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르꼬숑은 삼청동을 떠나 11월부터 원서동으로 자리를 옮긴다. 새 공간에서 자신의 저서 《탐식수필》을 들고 포즈를 취한 정상원 셰프.
미각 탐험 안내서 《탐식수필》

미각은 이중성을 지녔다. 지극히 심오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해내는 언어의 집은 좁디좁다. ‘맛있다’ ‘맛 좋다’ 외에 맛의 정도를 의미하는 ‘짜다’ ‘달다’ ‘맵다’ ‘쓰다’ ‘시다’를 떠나서 표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어떤 맛은 한 시절을 통째로 소환하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정상원 셰프는 맛이 지닌 그 심오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최근 정 셰프가 펴낸 《탐식수필》은 그가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맛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잘 보여준다. 4년간 아내와 유럽 등지로 떠난 탐식 여행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수필이라기보다 ‘유럽음식문명사’에 가깝다. 각 문화권의 요리가 어떻게 역사와 환경을 잊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왔는지, 풍부한 배경지식과 함께 가독성 있게 알려준다. 가령 ‘굴’ 요리를 소개하면서 안톤 체호프의 소설 〈굴〉에서 소년이 처음으로 프랑스식 굴 요리를 먹는 장면을 불러내고,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배우 이영애의 대사 “라면 먹고 가실래요”의 이면의 의미를 설명한다.

책은 웬만한 글쟁이도 울고 갈 정도로 문장력과 표현력이 뛰어나다. “우리도 모르게 구조화되었던 맛에 대한 인식의 해체를 모색한다”는 책 소개가 무색하지 않다. 기호학의 기표와 기의, 구조주의 비평가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까지 끌어와 음식을 설명하는데,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힌다. 특히 음식의 맛을 비유한 표현이 독창적이라 눈이 커질 때가 많다.


각각의 메뉴북은 저마다 콘셉트가 분명하다. 코스 메뉴를 다양한 문화적 코드로 재해석한 메뉴북은 완성도와 수준이 높다.
요리를 통해 표현 욕구 분출

정상원 셰프는 고려대학교 생명공학과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고2 때 창간된 잡지 《페이퍼》를 보고 충격받아 ‘이런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자퇴까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용기가 없어서” 자퇴도, 예술 관련 전공도 택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에도 표현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동생이 있는 프랑스에 갔다가 프랑스의 파인다이닝을 경험하고 가슴이 뛰었다.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표현에 대한 욕구가 한번에 밀려왔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인지 용기가 생겼죠. 저 자신을 설득하고, 주변을 설득해나갔어요. 스물아홉, 열 평짜리 공간에 ‘르꼬숑’을 열었습니다. 단순한 요리에서 파인다이닝까지, 12년 동안 한 브랜드 안에 다양한 콘셉트의 요리를 선보여왔어요.”

그의 창의력을 이끄는 최고의 자산은 호기심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 덕에 문학과 미술, 역사와 요리, 문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지식을 쌓게 됐다. 공부와 연구가 일상화된 삶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지식과 정보는 창의력의 질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평소 궁금한 게 생기면 그때그때 찾아봐요. 하나가 궁금해서 찾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하루 종일 찾기도 합니다. 나중엔 이걸 왜 찾게 됐는지 잊을 때가 많죠(웃음).”

정 셰프가 창작한 요리 세계는 손님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한 듯 존재 자체의 고양을 경험하지만, 누군가는 그저 ‘재밌네’ 정도로 끝나기도 한다. 경험과 지식의 스펙트럼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제 요리를 통해 문화적인 감동을 느끼면 좋겠어요. 그래서 곳곳에 장치들을 해나가는 거죠. 극소수의 손님만 알아차릴 수 있는 장치를 숨겨놓기도 하는데, 그런 손님을 만나면 짜릿해요. 최적화된 경험의 깊이 수준은 따로 없어요. 어떤 분은 여기까지, 또 어떤 분은 저기까지 느끼는데, 그 지점이 저마다 소중해요.”


특별한 날, 특별한 기억

정상원 셰프의 르꼬숑은 11월에 자리를 옮긴다. 삼청동 구옥을 떠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원서동 ‘공간’ 사옥 3층으로 이사한다. 공간이 주는 색다른 느낌까지 요리의 재료로 삼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르꼬숑은 ‘특별한 날’ 찾는 손님들이 많다. 그런 차원에서 새로운 공간이 주는 특별함은 더 클 것 같다.

“이곳에서 프러포즈했던 손님이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오기도 하고,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찾아오는 80대 노부부도 있어요. 그런 스토리가 르꼬숑을 더 특별하게 만듭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 창가 자리에 20대 딸과 60대 부부가 앉아 있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은 엄마 아빠를 위한 딸의 선물이었다. 내가 먼저 먹어보고 감동받은 음식을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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