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셰프 '르꼬숑' 정상원 上

세상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특별한 요리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첫 경험이었다. 음식을 통해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고, 기억과 경험이 물밀듯 왕창 소환되는 느낌은.
‘음식은 곧 문화’라는 명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상원 셰프의 식탁을 경험하면서 이 평범한 명제의 진의를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파인다이닝 ‘르꼬숑’ 정상원 셰프의 식탁은 보물찾기 같다. 음식 하나하나에 스토리를 담고, 그 스토리는 거대한 서사의 구성요소가 된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입으로 맛보는 것은 기본, 오랫동안 잠자던 기억을 기어코 불러낸다. 색다른 미식 체험이 한 개인의 개별적 경험과 문화적 환경 등과 맞물리면서 총체적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정상원 셰프가 ‘문화총괄셰프’로 불리는 이유다.

자, 독자 여러분을 정상원 셰프의 식탁으로 초대한다. 미식 체험 시간은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메뉴 곳곳에 암시와 복선이 숨어 있으니 두 눈을 크게 뜨시길. 2020년 하반기 ‘르꼬숑’의 테마는 ‘클래퍼를 든 셰프’, 부제는 ‘영화, 극장을 떠나다’다. 무려 72페이지에 달하는 메뉴북은 한 권의 잡지로도 손색없다. 정 셰프는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메뉴판을 미리 열면 안 된다”고 했다.

메뉴는 9단계. 장편 영화일 경우가 그렇고, 4단계 메뉴로 된 단편 영화 코스도 있다. 메뉴 자체에 영화 촬영 기법 용어를 차용했다. 각자의 영화관, 내러티브, 디졸브, 미장센, 페르소나, 데자뷰 등이 그것. 먼저 프랑스산 밀가루로 만든 식전 빵이 클래퍼 위에 담겨 나온다. 클래퍼는 영화 촬영 시, 감독이 ‘레디, 액션!’ 구호와 함께 소리를 내는 두 짝의 나무판을 말한다.

두 번째 메뉴는 ‘각자의 영화관’. 영화관의 기억을 담은 세 가지 아뮤즈 부쉬, 즉 팝콘과 땅콩, 오징어로 구성된다. 팝콘 위에는 프랑스산 버터와 트러플 치즈를 뿌리고, 짭조름한 캐슈넛 위에는 붉은 사프란을 실처럼 장식했다. 오징어는 무스로 진득하게 연출한 후 그 위에 프랑스산 캐비어를 얹었다.

세 번째 메뉴의 주인공은 달걀. 노른자로 수프를 만들어 달걀껍질에 담고, 향긋한 식용 꽃 ‘딜’로 장식했다. 정 셰프는 특히 이 메뉴를 강조했다.

“이번 메뉴는 내러티브입니다. 이 메뉴가 하나의 복선이 되어 맨 마지막에 똑같이 생긴 디저트를 이끌어갈 겁니다. 영화의 복선처럼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모든 요리는 영화 기법으로 재해석했다. 비트 잎을 올린 타타르(한우 육회)로 구성한 ‘콘트라스트’, 어간장 폼이 사라지면서 농어 맛이 극대화되는 ‘디졸브’, 검은 당근과 흰 당근 퓌레가 이끄는 ‘미장센’, 튀일(검은 밀가루로 만든 얇은 막)을 쓴 프로마제 치즈가 표현하는 ‘페르소나’ 등. 압권은 마지막 두 개의 메뉴다. 달걀노른자 수프가 암시한 ‘내러티브’ 복선은 아홉 번째 메뉴에서 흰자를 활용한 ‘데자뷰’로 만나고, 마지막 디저트 메뉴 ‘미장아빔’은 영화가 모두 끝난 뒤, 현실로 돌아온 순간의 느낌과 냄새를 재현한다.

“이건 나무예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와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죠. 극장에서 나왔더니 난데없이 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흙냄새가 올라오는 상황이에요. 젖은 흙의 냄새를 테이블 위에 올려보고 싶었습니다. 빗소리는 전통악기로 재현했고요.”


르꼬숑의 80번째 시즌 메뉴는 ‘클래퍼를 든 셰프’. 메뉴북만 72페이지에 달한다.
80번째 메뉴, 80번의 창작

이번 시즌은 ‘르꼬숑’의 80번째 메뉴다. 그 서사를 구현하는 도구와 방식은 시즌마다 다르다.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영화로, 때로는 향기로 코스를 꾸민다. 그동안 ‘기억의 도서관’ ‘문장의 맛’ ‘향수’ 등 요리의 세계를 다양한 장르에 녹여 표현했다. ‘기억의 도서관’ 메뉴북은 꽁꽁 맨 갈색 가죽 끈을 풀고, 편지봉투처럼 생긴 진회색 가죽 커버를 열어야 비로소 나타난다.

정상원 셰프는 음식이라는 재료로 한 개인이 가진 창의성을 얼마나 극대화해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메뉴북 앞부분에는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의 그 유명한 명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가 적혀 있다. 이는 정 셰프의 요리철학의 핵심이다. 그는 “창의성 구현이 가장 큰 고민”이라고 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어떻게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것’과 ‘창의적인 것’ 사이에 관심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내 개인적인 생각을 손님들에게도 느끼게 할까, 설득력 있게 구현할까를 늘 고민합니다. 설득하지 못하면 그냥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버리죠. 무엇보다 음식 맛이 중요해요. 맛이 없으면 음식 가지고 장난친 게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메뉴명은 ‘내러티브’. 달걀노른자 수프 위에 식용 꽃 ‘딜’을 올렸다. 이 메뉴는 아홉 번째 ‘데자뷰’에서 달걀흰자 콘셉트로 다시 마주친다.

메뉴명 ‘콘트라스트’는 비트 잎을 올린 한우 타타르로 구성했다. 육회의 맛과 식감이 비트의 그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메뉴명 ‘페르소나’는 튀일을 쓴 치즈다. 부드럽고 연약한 ‘이드’가 바삭한 ‘에고’ 뒤에 숨겨져 있는 상황을 표현한다.

마지막 메뉴는 ‘미장아빔’으로, 영화관을 나와 현실로 돌아온 순간을 요리로 표현했다. 비 온 뒤 흙냄새까지 테이블 위에 올렸다.

* 스토리 셰프 정상원下에서 이어집니다.
  •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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