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

늘 처음처럼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BH엔터테인먼트 

이미지 소모가 없다는 것. 배우로서 이만한 재능이 또 있을까.
이병헌은 무슨 역할이든 척척 소화해내며 전작이 뭐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게 한다. 〈공동경비구역 JSA〉 〈누구나 비밀은 있다〉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광해, 왕이 된 남자〉 〈내부자들〉 〈남한산성〉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겹치는 모습이 없다. 그냥 각각의 이병헌이다.
최근 개봉한 〈백두산〉 〈남산의 부장들〉에 이어 곧 촬영에 들어가는 〈비상선언〉 역시 또 다른 이병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 남자, 극중에서 똥만 눴다 하면 영화는 시원하게 터진다. 모히토에 가서 몰디브나 마시자던 〈내부자들〉의 안상구는 707만 관객을 동원했고, 볼일을 봤을 뿐인데 궁녀들에게 축하받은 가짜 왕은 〈광해, 왕이 된 남자〉로 1232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북한 요원 리준평 역시 흔쾌히 바지를 내렸고, 〈백두산〉은 2020년 쾌조를 이어갔다. 이쯤 되면 더럽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은 징크스다. 징크스의 주인공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에선 안 쌌는데 큰일”이라며 능글맞게 웃는다. 그 모습이 자못 여유롭다.

권력의 2인자부터 북한 공작원까지, 한 달 간격을 두고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 두 편이 개봉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중앙정보부 부장들과 이들이 주도한 정치 이면사를 근간으로 한 이야기, 1990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취재기이자 동명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이병헌은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맡아 절제된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앞서 개봉한 〈백두산〉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리준평. 첫 등장부터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작전에 협조하는 척하지만 진짜 목적은 숨긴 채 은밀하게 움직이는 북한 공작원이다. 김규평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화 〈백두산〉은 총 네 번의 화산 폭발이 예측된 가운데 마지막 폭발을 막기 위해 비밀작전에 투입된 리준평과 EOD(폭발물처리반) 대위 조인창(하정우)이 분투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연출된 대작의 기운은 리준평이 숲에서 볼일을 보다 도망치는 장면에서 나온다. 시나리오를 보고 이병헌은 고민했다. 찍을지, 말지가 아니었다. 엉덩이가 보이게 자세를 잡아야 할지, 고개만 빼꼼 내밀어야 할지였다. 결국 감독에게 물었고, 그제야 이해준 감독은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리고 싶었다”며 쑥스럽게 말을 꺼냈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이를 두고 이병헌은 “재미있다면 배우로서 흔쾌히 할 수 있는 장면인데 감독님이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다”고 했다. 오히려 “엉덩이 노출 장면이 있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나올까 봐 걱정했다”며 능청을 떤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그깟 엉덩이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대배우의 여유다.


외국어면 외국어, 액션이면 액션

영화 〈백두산〉 © CJ엔터테인먼트
〈백두산〉의 리준평은 첫 등장에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기 아닌디?”라고 말하는 북한 요원. 어딘가 빈틈이 보이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냉철하고 날카로운,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인물로 남북 사투리에 더해 중국어, 러시아어도 구사할 줄 아는 이중첩자다. 즉 이병헌은 네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인물을 묘사해야 했다.

“선생님이 네 분 있었어요. 북한 사투리 선생님 그리고 목포 사투리 선생님이요. 중국어와 러시아어는 배우기도 하고 녹음 파일을 반복해서 들었어요. 북한 사투리를 가장 편하게 사용해야 하는 배역이라 부담이 컸는데 막상 해보니까 중국어가 가장 힘들더라고요.”

물론 사투리나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힘들다. 그런데 그의 말이 앙탈처럼 들릴 만큼 이병헌은 외국어 습득 능력이 탁월하다. 2009년 영화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할 당시 순수 국내파임에도 유창한 영어를 선보인 바 있다. 이후 〈레드: 더 레전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미스컨덕트〉 〈매그니피센트7〉 등에 출연할 때도 이질감 하나 없었다. 2011년 일본 드라마 〈외교관 쿠로다코사쿠〉에서는 모든 대사를 영어로 소화했다. 한류 스타로 주목받으며 일본 현지 행사에 참여할 때는 팬들과 직접 일본어로도 소통했다.

대사뿐이겠는가, 아찔한 액션신도 척척 해냈다. 일찌감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는 자유자재로 총을 휘둘렀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는 지붕을 날아다녔다. 〈백두산〉에서도 총격, 카액션, 추락 등 다양한 액션 연기를 펼쳤다. 몸 던지는 걸 주저하지 않고 수차례 총기 훈련을 받으며 익힌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체 이 배우가 어디까지 해낼지 종잡을 수 없다. 이런 모습은 관객에게도 믿고 보는 배우로 다가서게 한다.

〈백두산〉을 보고 침이 고여 편의점으로 가 레몬사탕을 찾은 관객이라면 그에게 ‘영업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준평이 사탕을 오도독 씹는 과정에서 관객의 혀끝에 새콤달콤한 맛이 느껴진 터다. 극중 하정우가 먹던 사탕을 이병헌이 초반부터 뺏어 먹다가 마지막 무렵 “(이거) 달다”며 딸에게 건넨 그 레몬사탕 때문이 맞다. 정작 영화 속 사탕은 실제 시중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제품으로, 제작진이 만든 노란 케이스에 비타민을 담은 것뿐이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계자들도 끝나자마자 레몬사탕을 사먹었다고 하니 다시금 이병헌의 힘을 실감케 한다.


30년간 연기했지만

영화 〈남산의 부장들〉 © 쇼박스
사실 〈백두산〉은 화산 폭발에서 세상을 구하는 뻔하디뻔한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재난영화의 클리셰가 식상하지 않게 느껴진 건 이병헌의 완급 조절이 있어 가능했다. 눈동자의 각도,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 팽창한 핏줄까지도 의도한 양. 관객은 주먹을 꽉 쥐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순식간 몰입했다가도 그가 툭 던진 가벼운 한마디에 숨통이 트이곤 한다.

“연기 잘한다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촬영 전에 긴장도 되지만 대부분 기대감이 커요. 30년을 연기했지만 1년밖에 안 된 마음가짐으로 하려고 해요.”


한 분야에서 30년이면 장인이 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고민한다. 진심을 다해 연기하고 있는지, 흉내만 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는 “사소한 대사라도 진심을 다해 연기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온종일 기분이 좋다”면서도 “그런데 감정이 안 나와서 가짜로 흉내를 냈다고 느껴지는 날은 저도 모르게 ‘디프레스’된다”고 말한다.

이 남자, 가만 보니 더러운 징크스 이면에 많은 게 보인다. 큰일이 큰일을 친 게 아니었다. 30년 연기 인생에도 천연덕스럽게 바지를 내릴 수 있는 용기, 스토리 전개에 필요하다면 어떤 장면도 주저하지 않는 열정, 캐릭터를 위해 무엇이든 배우려는 준비된 자세, 여전히 촬영장을 기대하는 마음가짐이 한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 큰일을 내고 만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배역으로 어떤 사고를 칠까. 이병헌의 다음이 궁금해진다.
  • 2020년 0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