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인보다 배우 이시언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kth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TV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주던 ‘얼장(얼간이 대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웃음기 쫙 뺀 배우 이시언만 있었다. 간혹 유머 본능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부담감은 처음”이라며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10년 만에 주연으로 인사하는 자리이니 스스로도 낯설었으리라.
이시언은 최근 영화 〈아내를 죽였다〉에서 과음으로 필름이 끊긴 ‘블랙아웃’을 겪고 아내를 죽인 용의자로 몰리는 정호 역할을 맡았다. 김하라 감독은 “찌질한 구석도 있으면서 성실하고, 어떨 때는 잘생겨 보이는 평범한 일상의 인물을 찾아볼 때 이시언이 딱이었다”고 설명했다. 평범한 인물이 인생의 막다른 코너에 몰리기까지의 과정에서 이시언은 그동안 느꼈던 연기 갈증을 마음껏 풀어냈다.

“그동안 고민 없는 캐릭터 위주로 연기해서 지쳐가고 있었거든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 물론 아직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죠. 맛만 본 정도랄까요?”


모든 걸 바꿔놓은 〈나 혼자 산다〉


스물네 살, 부산에서 상경할 때만 해도 이시언은 거침없었다. 신병교육대 ‘독사’ 조교로 통했으며, 길에서 담배 피우는 청소년에게 훈계도 서슴지 않았다. 데뷔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편하게 움직였다. 적어도 주변 시선 때문에 의기소침하진 않았다. 그런데 〈나 혼자 산다〉가 인기를 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배우로서는 받아본 적 없는 관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저를 예능인으로 많이 알아봐요. 처음에는 제가 원하는 배우의 방향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참 고마운 프로그램이에요. 물론 당황스러울 때도 있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분이 왜 인사 안 하냐고 꾸짖기도 하고, 지나가다 ‘이시언’ 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모르는 사람이고. 저에 대한 관심이겠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를 피하게 돼요.”

여론의 질타도 받아봤기에 점차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가 늘어났다. 악플도 두렵지 않은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혀보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주택청약 당첨을 두고 특혜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시언은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나를 욕하는 것 같아 점점 집에만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순간, 문득 기자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마주한 이시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죽 재킷에 모자를 눌러쓰고 하객으로 참석한 그는 쉽게 눈에 띄었다. 주변은 수군거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쭈뼛쭈뼛,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아는 척하는 팬에게 고개 숙여 빼꼼 인사할 뿐이었다. 당시 ‘친근한 방송 이미지와 많이 다르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이해가 갔다. 가는 자리마다 수많은 시선과 접촉을 감내해야 하고, 늘 조심스레 행동하다가도 예능에서의 이미지를 기대하면서 친밀하게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굳어버렸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주변의 관심을 여유롭게 받아낼 만큼 곰살궂지도 능청스럽지도 못한 성격 탓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인기가 혼란스러워 익숙해지지 않으려 마음 깊은 곳에 방어막을 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미 한 번 내려온 경험이 있었다.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 한마디


이시언은 2009년 곽경택 감독의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의 중호 역할로 주연급에 파격 발탁됐다. 앞으로 장밋빛 연기 인생이 펼쳐질 거란 기대와 달리, 현장의 선배들은 “주인공으로 데뷔했지만 다음에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며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너지지 말고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라”고 조언했다. 이시언은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현실이 됐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방송 출연만 하면 잘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나마 힘든 하루를 버티게 해준 건 동료의 응원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방영을 앞두고 함께 출연한 서인국과 술을 마시던 날, 이시언은 오열하며 주절주절 속내를 털어놨다. 드라마가 잘될지, 돈도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라면서. 나이 서른을 넘긴 때라 막막한 현실이 그를 짓눌렀던 것이다. 다섯 살 어린 서인국은 말했다. “형, 잘될 거야. 지금부터야”라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무조건적인 응원은 그의 가슴에 훅 박혔다.

결과적으로 드라마는 ‘응답하라’ 열풍을 일으킬 만큼 성공했다. 이시언은 오지랖 넓은 수다쟁이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그 스스로에게는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현장 선배들의 조언을 떠올린다. 무너지지 말고 다시 올라가라는 그 말을. 언젠가 다시 올라갈 날을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렇게 드라마 〈W〉 〈라이브〉 〈플레이어〉 등과 영화 〈깡철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자전차왕 엄복동〉 등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이시언이 영화 〈아내를 죽였다〉로 다시 주연의 자리까지 차오르는 데 예능 프로그램이 그 속도를 높여준 건 부정할 수 없다. 데뷔 10년 차 배우에게 먼저 트로피를 안긴 자리도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 시상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 분명한 건 연기에 대한 갈증과 자기 확신으로 조연 생활을 채운 점이다. 자신감이 한없이 바닥을 칠 때 “잘될 거야”라는 한마디가 그를 일으켜세웠던 것처럼 정말 잘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앞으로 연기자로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날을 기대하며.
  • 202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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