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생 정유미

한국 영화에 없던 투명한 얼굴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롯데컬쳐웍스 

한 편의 시나리오가 정유미에게 찾아왔다.
시나리오 앞에는 그의 얼굴을 담은 몇 장의 사진이 있었다.
자신도 몰랐던 어떤 표정 그리고 작품을 함께하고 싶다는 정중한 제안이 담겨 있었다.
신생 영화사에서 처음 만드는 작품이었고, 배우이자 단편 영화 〈자유연기〉를 만든 연출자이면서 두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인 김도영 감독의 입봉작이었다.
김 감독은 “정유미라는 배우라면, 평범조차 투명하게 표현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많은 감독과 평론가들이 정유미를 가리켜 “한국 영화에 없던 얼굴”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건 그만큼 한 인물과 그의 이야기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배우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비추는 인물은 보는 사람을 뜨끔하게 할 정도로 정직해서 정확하다. 그 정직함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단순함’인데,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단순해지기가 어찌 그리 쉬운가. 그건 일종의 용기고, 그게 그의 연기를 독보적으로 만든다.


용기를 내어, 연기를 할 뿐

2016년 발간된 소설 《82년생 김지영》. 책은 백만의 독자가 읽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논쟁했다. ‘지영’은 당시 태어난 여아의 이름 중 가장 많은 이름이다. 개인인 동시에 대명사인 셈이다. 김지영을 ‘사람’이 아닌 ‘여성’으로 규정하면서 일어난 성 대결은 ‘여혐’ 혹은 ‘남혐’이라는 사나운 말들로 번졌다. 이는 소설에 대한 오독이거나, 김지영에 대한 모독이었다. 정유미는 아직 소설을 읽기 전이었고,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사람’이 보였다고 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잔잔히, 천천히 저에게 다가왔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덮고 나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요. 잔잔한 파고가 마음속에 일렁였죠.”

2004년 김종관 감독의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연기를 시작하고, 〈사랑니〉로 이름 석 자를 알린 그는 이후 적지 않은 작품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처럼 독립적인 영화도 있고,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염력〉, 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처럼 대중적인 영화도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번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내 깡패 같은 애인〉이나 〈도가니〉와 같은 궤에 넣을 수 있다. 정유미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반지하에 사는 취업 준비생 세진이었고, 〈도가니〉에서는 청각장애학교의 성폭력 피해 아동을 돕는 사회복지사 유진이었다. 그는 동시대에 일어나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며 한 시절을 살아냈다.

배우는 겪어보지 않은 삶을 이해하는 직업이다. 결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아이를 낳았느냐 낳지 않았느냐의 차원을 넘어 어떤 시대와 세계를 이해하고 흡수한다. 정유미는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 수용성 좋은 스펀지 같다.

“이번 작품을 하는 데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진 않았어요. 다만 저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고, 이 이야기를 잘 표현해내는 게 제 몫이었죠. 집중하기 위해선 단순해져야 했어요. 제가 힘든 건 굳이 생각을 안 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웃음), 무엇보다 작품 외에 다른 게 저를 방해하는 건 싫거든요.”


빠른 83년생이라 82년생과 함께 생활했음에도 그가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알게 된 건 지금껏 누려온 삶에 ‘당연한 일’은 없다는 것,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양보와 헌신으로 이뤄진 삶이라는 것이다. 서른넷, 26개월 아이를 키우는 지영은 출산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맘이 됐다. 그도 처음부터 불행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다정하고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그와 별개로 요일의 구분이 없는 매일을 살다 보니 출구가 없는 벽에 갇힌 기분이었다. 빨래를 삶고, 설거지를 하고, 장난감을 소독하고, 아이 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나면 창 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럴 때면 어쩐지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지영이 손목에 아대를 하고 있는 모습이나, 집 안이든 밖이든 아기 띠를 매고 있는 모습, 유모차를 밀 때 손이 아니라 발을 사용하는 디테일은 감독님께 힌트를 얻었어요. 전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는데, 지금은 밖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보이더라고요. 육아를 하는 친구들이 왜 그렇게 잠깐이라도 밖에 나오고 싶어 했는지도요.”

더불어 ‘나는 어떻게 자랐나’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어떻게 키웠나’ ‘내 남동생은 나를 위해 양보한 것들이 없었나’ ‘내 친구들은 내 무심함에 상처받지 않았나’ 등의 생각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극 중 지영에게도 많은 사람이 스쳐간다. 지영은 평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아니다. 3남매 중 둘째 딸인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고마워”이거나 “미안해”다. 그런 그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그의 삶에 누군가의 삶이 포개질 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의 엄마나 외할머니처럼 자식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양보했던 이들이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저 역시 생각도 못 한 부분들이 있었어요. 마지막에는 눈물이 너무 나서 멈춰지지가 않더라고요. 저도, 공유 씨도 너무 울어서 서로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소설이 여기서 먹먹한 이야기를 마친다면,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지영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덕분에 그는 노을 지는 저녁에도 멍해지는 대신 웃을 수 있게 된다.

“소설의 몫이 있고, 영화의 몫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보편의 이야기를 담는 영화는 희망을 말해주기를 바라거든요. 이번 영화도 그래서 마음이 더 끌렸던 것 같아요.”


“당신의 이름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잘 찾아온 것 같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타인의 이름, 흔한 이름과 낯선 이름, 앞에 있던 이름과 그 뒤에 있던 이름, 침묵하던 이름과 펑펑 울던 이름… 당신의 이름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잘 찾아온 것 같습니다.”

서효인 시인의 〈김지영을 찾아서〉라는 시다. 정유미가 영화를 만들면서 공책에 써두고 내내 읽었던 문장이다. 영화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을 때는 소설을 펴고 오래오래 읽었다. 숱한 김지영의 마음이 만져지길 바라면서.

책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는 영화를 본 뒤 “영화는 소설보다 좀 더 나아갔다”고 말했다. 소설이 나온 2016년과 영화가 개봉된 2019년은 또 다르다. 2016년의 김지영은 숨죽여 울었지만, 2019년의 김지영은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저를 아세요?”라고 묻는다.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는지 아느냐”고.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이 찰나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려고 애쓰느냐”고.

서로 악의를 갖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피치 못할 상처를 주고받는다. 태어난 시대가, 태어난 가정이, 태어난 성별이 주는 굴레다. 소설과 영화는 그 밖에서 그 안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일로, 굴레에 균열을 낸다. 그러려면 그 삶을 투명하게 비추는 배우라는 반사경이 필요하다. 정유미라는 말갛게 닦인 거울이, 다음엔 어떤 세상을 비출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그의 마음이 동한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연대하고 싶은’ 작품을 해온 것 같아요. 단순히 이야기가 좋아서, 인물이 좋아서는 아니었고요. ‘이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함께해야죠.”
  •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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