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라미란

‘연기할 때 연기하지 말자’ 나만의 약속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라미란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고한리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탄광촌에서 살았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5남매를 키우며 탄광촌에서 하숙집을 했다. 그는 지금도 다섯 살 적의 기억이 또렷하다. 동네 친구들과 출렁다리를 건너 건넛마을에 갔는데, 거리에서 각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즐거워했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친구들과 돌아와 역할을 나누고 ‘얼씨구씨구 들어간다~’며 똑같이 흉내를 냈다. “아마 그때가 처음 배우를 꿈꿨을 때였던 것 같다”고 라미란은 말했다.

사실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학창 시절에도 앞에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가 언니와 함께 병원에 가면 막내인 그가 반찬을 만들고 하숙집 살림을 도왔다. 지금도 웬만한 요리는 뚝딱 만드는데, 그때 생긴 내공이다. 그뿐 아니다. 그는 여러 감독들에게 “생활 연기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아무래도 강원도 탄광촌 하숙집에서 쌓인 공력 같다고 한다. 농담을 좋아하고, 그림과 노래를 좋아하고 운동도 잘했던 그는 “공부보다는 예체능 쪽으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나중에야 그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연극’이었다. 1993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다. 바야흐로 라미란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첫 주연,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출연한 영화는 마흔여덟 편, 연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습니다. 제 나이 마흔다섯에 첫 주연을 맡게 됐네요.”

지난 5월 〈걸캅스〉 언론배급시사회 무대에 선 라미란이 말했다. 〈걸캅스〉는 라미란과 이성경이 ‘경찰 아닌 경찰’로 디지털 성범죄에 맞서는 버디무비다. 라미란의 첫 상업영화 주연작이라 관심이 쏠렸다. 50편에 가까운 영화를 찍으면서도 ‘내가 주연인’ 영화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느낀 날도, 이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액션을 할 수 있을까’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영화를 끌고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저도 안 될 줄 알았어요. 스스로 한계를 정해둔 거죠. 그런데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였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봐야 안다는 걸 이번 작품을 통해서 또 배웠어요. 연골이 버텨줄 때까지는 해보려고요.(웃음)”

그에게 주연을 제안한 건 이미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소원〉을 함께한 바 있는 제작자다. 변봉현 필름모멘텀 대표는 “언젠가 라미란을 주연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라미란은 그 말만으로도 고마워 “무슨 영화를 하자고 해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시나리오가 술술 읽히더라고요. 그게 중요하거든요. 오랜 약속을 지켜준 제작자에게도 고마웠고요. ‘제 모습이 담긴’ 시나리오였다기보다는, ‘저에게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 담긴 영화였던 거 같아요. 레슬링을 주특기로 설정한 것도 제 몸에 맞춘 게 아닌가 싶고요.(일동 폭소)”

영화 속에서 그는 한때 강력계 전설의 형사였지만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민원실 주무관으로 밀려난 생계형 공무원 박미영 역을 맡았다. 기존의 남성 버디무비와는 달리, 그를 둘러싼 시월드와 워킹맘으로서의 애환, 여성으로서 경력을 유지하는 일 등의 고민이 담겼다. 또 여성 경찰이 아니었다면,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된 익명의 피해자들을 보며 “우리가 치자. 우리밖에 없어”라고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라미란의 숙제 중 하나는 여성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영화를 하기 전에는 저도 비슷했어요. ‘클럽에 안 가면 되지’ ‘부킹을 안 하면 되지’ 그런 안이한 생각이었죠.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가 피할 수 있는 범죄가 아니에요.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지도 않고요. 나도, 내 동생도, 내 친구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죠. 그런데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을 탓하며 침묵해야 하는 상황이 부아가 치밀었어요.”

그는 작품을 하면서 사회와 정치, 역사와 삶을 배운다. 이번에도 성범죄가 얼마나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봤다. 영화 〈소원〉을 하면서 느꼈던 아이들에 대한 슬픔과 미안함, 〈특별시민〉을 찍으면서 배운 정치의 생리, 〈히말라야〉에서 배운 산악인들의 생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도 제시해준다. “할 수 있는 게 연기밖에 없어” 배우를 하지만, “연기를 하며 다른 이들의 생을 살아볼 때 가장 신나기 때문에” 그는 연기가 좋다.


박찬욱 감독이 발견한 ‘흙 속의 진주’


“연극과 공연을 하면서 20대를 보냈어요. 스스로도 TV에 나올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쉽지가 않더라고요. 아이 낳고 1년 정도 지났는데, 영화 〈친절한 금자씨〉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20대 중반에 돌렸던 프로필이 돌고 돌아 거기까지 갔더라고요. 사람 일 참 모르죠. 제가 긴장을 잘 안 하는데 그땐 왠지 심장이 두근대는 게 딱 붙을 것 같더라고요.(웃음) 저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때인데도 선택해준 게 너무 고마웠어요. 영화 촬영장에 가니 살 것 같았죠. 코에 바람 넣어가며 일할 수 있는 게 너무 기뻤고요.”

당시 라미란을 오수희 역에 캐스팅한 박찬욱 감독은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것 같았다”고 했다. 이후 그는 크고 작은 배역으로 영화에 쉼 없이 얼굴을 비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장에서 ‘살맛’을 느끼는 그는 마흔여덟 작품을 지나며 소진된다거나 지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도 보셨겠지만, 저는 틈 날 때마다 드러누워요.(일동 웃음) 일 안 할 때는 가만히 에너지를 비축하다가, 일하러 나오면 이렇게 쌩쌩해지는 거죠.”

일하면서 군대에도 다녀오고(MBC 〈진짜 사나이〉), 산에도 다녀왔다(영화 〈히말라야〉). 그러다 보니 근성도 근력도 더 단단해졌다. 그뿐인가. 걸그룹에도 도전했고(KBS 〈언니들의 슬램덩크〉), tvN 〈막돼먹은 영애씨〉에서는 ‘낙원사 터줏대감’ 라부장으로 시즌 17까지 함께했다.

“이제 와서 그만 하면 ‘떴다고 변했다’는 소리 들을지도 몰라요. 보는 사람들이 질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작품 안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해요. 나름 전략적으로 접근하죠. 이번 시즌에는 영애가 워킹맘이 되면서 라부장과 겹칠까 봐 고민이 많았어요. 제작진과 논의를 많이 했죠.”


원래 거기에 있었던 사람처럼

〈걸캅스〉의 첫 상업영화 주연이라는 타이틀로 라미란은 요즘 ‘희망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그로서는 오히려 ‘가늘고 길게, 있는 듯 없는 듯’ 가려고 했던 전략이 무너질까 봐 걱정되는 날들이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요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보며 배우 김혜자의 대상 수상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작은 역이든, 큰 역이든 선배님처럼 저렇게 평생 연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어느 작품이든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있고 싶어요. 저 나름대로 원칙은 ‘연기할 때 연기하지 말자’는 거거든요. 최대한 뭘 안 하려고 하다 보니, 어떤 인물이든 제 모습이 많이 나와요.”

보는 이들이 라미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의 등장으로 바뀌는 공기와 생기, 생활의 활기 같은 것들이다. 그는 그 기대를 모자람 없이 채운다. 인터뷰 때도 마찬가지다. 주연일 때는 주연처럼, 조연일 때는 또 조연처럼. JTBC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에서 그는 잠깐의 카메오 출연으로 안방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혼자 웃고 우는 게 아니라, 보는 이들을 함께 웃고 울리는 건 분명한 재능이다. 연기하지 않으면서 연기하는 배우. ‘가늘고 길었던’ 그의 연기 인생의 마디가 이제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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