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평범한 내가 꿈꾸는 비범한 세계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왓챠 

박찬욱 감독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은 매일 비슷하다. 산책을 하고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준다. 이 평범한 일상을 사는 그는, 자신의 사적인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비범한 순간들을 꿈꾼다.

“제가 성장한 과정이나 지금의 삶이 그리 특별하진 않았습니다. 특별히 부유하거나 가난하지도 않았고요. 지금도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죠. 그러다 보니 일을 할 때는 더 새롭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찾게 됩니다. 안주하면 쉽게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칸이 사랑해 ‘칸느 박’이라는 별칭이 붙은 감독이자 니콜 키드먼, 마이클 섀넌 등 세계적인 배우들과 작품을 만들고 한국 영화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그가 자신의 삶을 평범하다고 한다. 작품과 삶을 분리해 생각해서다.


평범하고 안주하는 삶을 벗어난 작품에 매료되는 그가 이번에 만든 작품은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이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을 영상으로 재해석했는데, 워낙 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까닭에 이번 작품은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제작했다. 6부작으로 먼저 영국 BBC와 미국 AMC에서 방영됐다.

“감독이 영화와 드라마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히 있는 일이라 거부감은 없었고, 긴 이야기를 하는 데 좋은 기회라 생각했어요. 막상 ‘현타’가 온 건 다 만들고 나서 런던영화제에서 첫 1, 2편을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에요. 유난히 큰 화면에 좋은 사운드로 보고 나니 이 작품을 영화로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실화인가 싶더라고요. 저는 버릇처럼 스크린에서 보는 걸 생각하고 찍었고, 죽을 둥 살 둥 후반 작업도 했거든요. 다음에 제가 또 드라마를 한다면 이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길고도 좋은 이야기’여야겠죠.”


자신이 선택했지만, 선택하지 않은 삶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 제법 있다. 최근작인 〈아가씨〉도 영국 작가인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가 원작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올드보이〉는 일본의 망가와 오이디푸스 신화가 배경이 됐다.

“캐릭터가 구축돼 있을 경우엔 출발점을 삼기가 좋죠. 읽을 때는 영상으로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읽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불이 지펴지는 경우가 있어요. 순수하게 문학으로 좋아하는 작품도 훨씬 많지만, 영상으로 옮기면 작품의 매력이 더 살아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어요. 옷이나 장신구, 행동거지는 글로 읽는 것보다 영상 쪽이 훨씬 더 사실적이죠.”

그의 영화에는 ‘미장센’에 대한 찬사가 따라온다. 미장센이란 ‘어디에 무엇을 배치할지를 정하는’ 연출의 묘를 뜻한다. 세밀한 배치로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 각각의 디테일을 살려내는 게 그의 장기다. 이번 작품에 참여한 마리아 듀코빅 디자이너는 “박찬욱 감독은 미장센에 통달했다. 굉장히 대담하고, 낯선 요소도 개방적으로 수용한다”고 말했다. 반면 작품성에 있어서는 타협이 없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1970년대 분위기를 포착하기 위해 130여 개의 오픈 세트를 만들었다. 영국과 그리스, 체코를 오가며 당대를 재현했다. 그가 재현하고자 한 건 외관뿐 아니라 혼란이었다. 강대국의 체스 게임에 작은 말이 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처지를 역사의 풍랑 한가운데 선 개인의 삶에 대입했다.

“한국이 가진 역사적 비극의 요소가 있죠. 남의 이야기같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 작품의 배경에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이라는 당사자들이 제국주의, 강대국에 의해 휘둘리는 부분이 있어서였을 거예요. 폭력은 엄청난 증오를 낳아요. 이 증오는 더 큰 앙갚음을 유발하고요.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할퀴는지 그리고 회복은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했죠. 전쟁과 테러가 되풀이되고, 테러는 다시 전쟁의 명분이 되고요. 이들에게는 전쟁도 하나의 직업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무감각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그 엄혹한 공간에서도 남한군과 북한군 사이에 우정은 피어났듯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첩보전 안에서도 로맨스는 싹튼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이 피어납니다. 사랑과 전쟁이 별개가 아닌 거죠.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반해서 일어난 일이 첩보가 되죠. 자신이 선택한 삶 같지만 사실은 선택하지 못한 삶인 거고, 찰리의 감정도 스파이 게임의 일부인 겁니다.”

찰리 역을 맡은 플로렌스 퓨를 통해 박찬욱 감독은 ‘젊음, 용기, 호기심’이라는 긍정적인 욕망을 읽었다. 〈레이디 맥베스〉에서부터 인상적이었던 그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운명 앞에 주눅들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질주한다.

박찬욱 감독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은 작품을 통해 인상을 받고 직접 만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요한 배역일수록 꼭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영화 일을 오래하다 보니, 캐릭터와 배우에 대한 감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현재 독보적인 배우 반열에 오른 김태리가 떠오른다. 3년 전 〈아가씨〉의 제작 보고회에서 숙희 역을 맡은 김태리는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어쩔 줄 몰라 했고, 너무 긴장한 탓에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태리는… 그날 그렇게 공식 석상에서 긴장하고 떨었던 것도 다 연기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있습니다.(일동 웃음) 전작이 있는 경우엔 작품을 보고 캐스팅을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진 않고 반드시 만납니다. 만남을 통해 확신을 갖는 경우가 많죠.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래야 합격’이라기보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선택입니다.”


그리스 허름한 여관방에서 눈뜰 때


한국 시청자들이 보게 되는 건 ‘감독판’이다. 영국과 호주 등에서 공개된 ‘방송판’과는 다르다. 한국 관객은 그에게 특별하기에, “특별한 관객에게 특별한 버전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박 감독의 말이다. OTT 플랫폼인 ‘왓챠플레이’가 〈리틀 드러머 걸〉의 방영권을 따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요구한 두 가지는, 감독판을 틀어달라는 것과 이벤트로 영화관에서도 상영해달라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관객을 염두에 두고, 덜 세밀하게 찍지는 않았어요. 한국 관객들이 볼 자막도 황석희 번역가와 함께 열일곱 시간 동안 작업했습니다. 미묘한 말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제가 네이티브가 아니라 영어의 원뜻을 다 파악하진 못하겠지만, 먼저 한국어로 각본을 쓰고 외국 작가가 영어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크로스 체크를 했습니다. 나라 간 미묘한 입장 차이에 대해서는 현장에 있는 팔레스타인 스태프와 이스라엘 스태프의 의견을 들었고요.”

해외에서 긴 여정을 보내다 보면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스 바닷가의 허름한 여관에서 눈을 뜰 때는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살다 보면 또 문득 자극적인 세계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러다 보니 몸도 핼쑥해지고, 머리도 하얗게 세었지만 그는 아까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직업적인 저의 모습은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1992년 박찬욱 감독이 처음 만든 영화의 제목은 〈달은...해가 꾸는 꿈〉이었다. 대중의 기억에는 거의 남지 않았을 정도로 존재감 없이 사라졌지만,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지 않다. 해가 비추는 평범한 일상을 지나, 사위가 자욱해지고 풍경이 달라졌을 때 떠오르는 달에 대한 관심. 그 꿈이 오늘 박찬욱을 또 설레게 한다.
  •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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