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얼굴 류준열

“생긴 대로 살자 내 얼굴에 책임지면서”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쇼박스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돈〉의 마지막 장면과 첫 장면에서 류준열은 같은 옷을 입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가방을 메고, 같은 시계를 찼지만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120분 동안 그는 생의 환희와 환멸, 축복과 저주를 함께 맛봤다. 증권사의 신입 브로커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그에게 느닷없이 부의 급행열차가 멈춰 선다. 탐욕의 상승 곡선을 타고 도달한 곳은 천 길 낭떠러지. 이 아비규환을 겪고 난 류준열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나서 영화의 앞부분을 다시 찍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포기했죠. 얼굴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감독님도, 스태프도 ‘처음이랑 영 다른 느낌이라 안 되겠다’고 했어요. 정말 놀랐어요. 인물의 경험이 내 얼굴에 쌓인다는 게 무섭기도 했고요.”

2019년 류준열의 얼굴에는 숱한 이들이 쌓여 있다. SNS로 현피를 중계하던 〈소셜포비아〉(2015)의 BJ 양게, 의리와 죽음을 맞바꾼 〈더 킹〉(2017)의 두일,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르던 〈택시운전사〉(2017)의 대학생 재식, 청년 농부가 된 〈리틀 포레스트〉(2018)의 재하, 말단 조직원과 의문의 이 선생을 모두 소화한 〈독전〉(2018)의 락과 〈뺑반〉(2019)의 에이스 서민재까지. 이 모든 인물이 차곡차곡 쌓인 그는 지금 ‘청춘의 아이콘’이라 불린다.


〈돈〉으로 알게 된 영화의 맛

류준열의 데뷔작인 〈소셜포비아〉(2015년)와 최근 개봉작 〈돈〉. 4년 만에 그는 포스터를 혼자 채우고 있다.
2015년 〈소셜포비아〉의 류준열은 포스터 왼편에 흐릿하게 서 있었는데, 2019년 〈돈〉의 류준열은 혼자 한 영화를 다 채우고 있네요.

“그런가요? (잠시 생각) 그러네요! 저 혼자 포스터에 나온 첫 영화네요.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소셜포비아〉 개봉했을 때는 포스터를 찍어서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포스터에 나온 첫 영화라서요.”

(인터뷰 장소에 있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보면서도 몰랐나요?

“제가 그런 데 참 무뎌요. 조연인가, 주연인가 이런 것에도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 편이고요. 대부분의 배우가 그렇겠지만, 분량이 적으니 덜 열심히 하고 분량이 많으니 더 열심히 하고 그러진 않거든요. 현장에 오는 마음은 똑같아요.”

그렇게 무딘 성품이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반대로, 분량이 적어진다거나 흥행이 잘 안 된다고 해도요.

“오디션을 보던 시절에도 참 많이 떨어졌어요. 그때도 그걸 마음에 오래 품고 있지는 않았어요. 항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영화가 잘되면 너무 좋겠지만 관객이 많이 오고, 오지 않는 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잘 받아들이고, 잘 보내줘야죠.”

〈응답하라 1988〉의 오디션 장면은 여러모로 화제가 됐습니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연기를 하더군요. 그렇게 긴장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요.

“엄청 긴장했어요.(웃음) 신원호 감독님과 이우정 작가님이 워낙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셔서 가능했죠. 똑같이 100을 가진 사람도, 어떤 분위기에서 오디션을 보느냐에 따라 50이 되기도 하고 200이 되기도 합니다. 〈응답하라 1988〉은 후자였죠.”

그 후 작품을 보면 원래 200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정우성과 조인성을 만나도(영화 〈더 킹〉), 송강호와 최민식을 만나도(〈택시운전사〉와 〈침묵〉) 밀리지 않더군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아마 그렇게 보였다면 그건 순전히 선배님들 덕입니다. 현장에서 선배님들을 보면서 느낀 건 ‘오래가는 분들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이미 수십 년간 연기를 해오신 분들인데도, 굉장히 성실하게 열심히 하세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챙기고요. 그땐 몰랐는데 제가 이번에 〈돈〉을 찍으면서 선배님들이 말씀하시던 ‘영화 만드는 맛’을 알았습니다.”

어떤 맛인가요.

“촬영 끝내고 다 같이 뒤풀이를 가요. 그 자리에서 ‘오늘 이 장면은 이랬고, 내일은 이렇게 하면 좋겠다’와 같은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죠. 모두가 영화만 생각하고, 어떻게든 잘 만들 생각을 하는 자리는 정말로 신나요. 박누리 감독님이 현장에서나 뒤풀이에서나 배우들을 신나게 해주는 분이기도 하고요. 아주 나중에 영화 하는 재미를 느낀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영화 〈돈〉을 찍을 때였습니다’라고 답할 것 같아요.”

〈돈〉은 의상을 보는 맛도 있었습니다. 작전에 성공할 때마다 슈트의 때깔도 달라지죠.

“저는 워낙 옷을 좋아하고 옷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역을 생각할 때도 옷의 도움을 받고요. 슈트 쪽은 제가 잘 모르는 분야였습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슈트의 멋과 촉감에 대해 알게 됐죠. 자기 몸에 맞춤인 정장을 입으면 자세도 달라지더라고요.”


평범한 우리를 대변하는 인물


인터뷰가 있던 날,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류준열은 가로 줄무늬 스웨터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볼 위로 파이는 인디언 보조개는 천진난만하고 개구쟁이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 옷을 좋아한다던 그의 ‘사복 패션’은 이미 ‘류준열 남친룩’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깔끔한 옷차림에 모자나 신발, 가방으로 포인트를 준다. 183㎝의 큰 키에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그의 몸에 편안하고 센스 있는 캐주얼은 맞춤복처럼 잘 어울린다.

〈돈〉은 〈남자가 사랑할 때〉, 〈부당거래〉, 〈베를린〉 등의 영화에서 연출부와 조감독을 거친 박누리 감독의 입봉작이다. 실제 증권 브로커 출신인 작가 장현도의 소설 《돈-어느 신입사원의 위대한 머니 게임》이 영화의 원작이다. 박 감독은 ‘돈의 유혹 앞에 놓인 평범한 우리’를 대변하는 조일현 역에 류준열을 대입했다. 류준열의 얼굴이라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소심한 청년부터 탐욕에 눈이 멀어 덫에 빠진 남자까지 가능하리라 봤다.

외람되지만 류준열 배우를 보면 ‘우리 세계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배우를 보면 ‘다른 세계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칭찬…이시죠?(웃음)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제가 정말 많이 듣는 말이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다’ ‘아는 사람 닮았다’는 이야기예요. 모아보면, 저는 ‘먼 친척’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자주 보지는 않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작품 속에서 배우가 겪는 일에 더 이입하고 몰입하게 되기도 하고요.

“만약 그렇다면 저한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게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거든요. 작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삶도 생각해보면, ‘어색한 인생’은 없거든요.”

얼마 전 시작한 여행 프로그램 〈트래블러〉도 의외의 재미가 있었습니다.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더군요.

“의외였나요? 그만큼 기대를 안 하셨군요.(웃음) 촬영하기 전에는 긴장을 많이 했어요.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럴 땐 제가 생각보다 예민한가 봐요.(일동 웃음)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까 제가 워낙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쿠바라는 나라 자체가 주는 재미가 커서 너무 즐거웠어요. 쿠바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중이라 하루라도 빨리 가보길 추천해 드립니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영어’였죠. 우리 귀에도 잘 들리고, 현지인에게도 잘 통하는 생활영어가 능숙하던데요.

“제가 워낙 미드를 좋아해요.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들리고 알게 되는 표현들이 있어요. 그렇다고 저절로 마법처럼 영어가 툭 튀어나오는 건 아니고요. 어떤 분들은 제가 그냥 막 하는 줄 아시던데(일동 웃음) 나름 공부를 합니다. 영어는 공부를 해야 늘더라고요.”

어떤 미드와 영화를 즐겨 보나요.

“장르물을 좋아해요. 전쟁 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같은 영화는 아주 고전인데도, 좀비 영화의 ABC가 담겨 있죠. 문을 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열고, 구하면 안 되는 사람을 구하고 그런 구조예요. 지금 〈전투〉라는 전쟁 영화를 찍고 있으니, 언젠간 좀비물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좀비를 하고 싶은 건가요?

“(놀라며) 아뇨, 아뇨. 혼비백산해서 도망 다니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류준열을 표현하는 다른 말에는 ‘성공한 덕후’가 있는데요. 축구 덕후, 스폰지밥 덕후 등이 있죠. 하나를 좋아하면 깊게 파는 스타일인가요?

“반대예요. 워낙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데, 축구랑 스폰지밥이 그중 제일 오래가는 거 같아요. 스폰지밥도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만화라 자주 보는 건데, 그게 알려지고 나서 팬분들이 스폰지밥 굿즈를 보내주시고 집에 스폰지밥 관련 물건이 늘어나니까, 이제는 서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이’가 됐죠.(일동 웃음)”

축구도 그렇죠. 영국에서 프리미어리그를 직접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고요. 손흥민 선수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이’ 아닌가요. (류준열의 영화 〈돈〉과 여행 프로그램 〈트래블러〉에는 모두 절친으로 알려진 축구 선수 손흥민이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항상 축구 이야기를 했어요. 축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죠. 경기장에서 축구를 보면 정말 긴장돼요. 관객의 마음이 아니에요. 다치면 괜히 내 책임인 것 같고, 골을 넣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요. 지난번 도르트문트와 16강 경기에서는 흥민이가 골을 넣어서 정말 다행이었죠.”

두 사람은 어떻게 친해졌나요?

“아는 분의 소개로 함께 식사하게 된 자리가 있었어요. 처음 만난 건데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하더라고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요. 저희 둘을 모두 아는 분이 ‘평소에도 둘이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관심사나 말투 같은 부분이요. 친해지고 나서는 더 그런 거 같아요. 흥민이는 지금도 제가 나온 영화는 다 보고, 리뷰도 해줘요. 고마운 친구죠.”

조금 전까진 아주 친숙했는데 갑자기 멀게 느껴집니다.(웃음) 영화 속 일현처럼, 지난 4년이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지진 않나요?

“무명 배우일 때도 저는 제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땐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방과후교실에서 어린이들에게 연기를 가르쳐주는 수업도 했거든요.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음악은 악기가 있어야 하고, 미술은 물감이 있어야 하지만,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했어요. 아무것도 없던 제가 연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것 같아요.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생긴 대로 살자. 대신 내 얼굴에 책임을 지면서 살자’ 그런 마음이에요.”

영화 〈돈〉은 ‘액션 없는 액션 영화’다. 폭력도 없고 살인도 없지만,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숱한 이들이 등장한다. 류준열은 영화의 마지막, 초점 없는 눈빛으로 지하철을 타고 달리는 일현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적당히 후련하고, 적당히 허망한 그런 눈빛이다. 앞으로 류준열의 기차에는 또 많은 인물들이 타고 내릴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이들을 정답게 맞이하고, 다정히 떠나보낼 것이다. 영화 〈뺑반〉이 떠나기 무섭게 〈돈〉이 찾아왔듯 다음 플랫폼에는 대한독립군이 최초로 승리한 ‘봉오동 전투’의 독립군 얼굴로 기다리는 영화 〈전투〉의 류준열이 있다. 아직도 꺼내보지 못한 수많은 류준열이 있고, 그와 함께할 여행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건 퍽 달가운 일이다.
  •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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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김이화   ( 2019-03-26 ) 찬성 : 0 반대 : 0
김선생말고 이선생이요ㅜ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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