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희 무의 이사장

지도로 만드는 지도 없는 세상

글 : 김가원 명예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홍윤희 이사장은 이베이코리아 홍보팀장으로, 소셜 임팩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장애를 가진 딸을 위한 고민에서 출발, 장애 비장애를 아우르는 통합 콘텐츠 협동조합 ‘무의’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2011년 서울 고속터미널 지하철역 환승 구간에 휠체어 리프트 고장 문구가 붙었다.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 났으니 7호선으로 갈아타려는 사람은 뒤로 돌아 9호선을 타고 4호선으로 갈아타 다시 7호선으로 갈아타라는 내용이었다. 관련 부서 전화번호, 수리 완료를 알리는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는 딸을 둔 엄마가 역무실에 전화했다.

역무실에서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반문했더니, “계단 위쪽에 계시면 9호선이나 3호선으로 연락하시고요, 밑에 계시면 7호선에 연락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고속터미널역을 지나는 3·7·9호선을 운영하는 회사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불친절한 안내에 화가 난 엄마는 이날 일을 SNS에 올렸다. 한 기자가 그 글을 읽고 기사를 냈더니 그다음 날 국토교통부에서 해명 자료가 나왔다. 그때 엄마는 깨달았다. ‘문제를 제기하니 바뀌는구나.’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 지도를 만든 홍윤희 무의 이사장의 이야기다.


딸 지민이의 그곳에 쉽게 가고 싶다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 지도의 텍스트 버전.
무의(無意, muui)는 장애가 무의미한 세상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은 장애인 이동권 콘텐츠 제작 협동조합이다. 장애·비장애를 아우르는 통합 콘텐츠 제작을 통해 장애에 대한 부정적·의존적인 인식을 개선하고자 한다. 휠체어 여행기를 담은 비디오,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 지도 제작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5년 하버드대 학생이었던 김건호 씨가 홍 이사장에게 제안해 함께 활동하게 됐고, 2016년 말 협동조합 법인을 설립했다. 김건호 씨는 휠체어를 타고 미국을 횡단한 내용을 담은 책 《20 States on Wheels》를 출간한 바 있다.

문제 제기의 필요성을 깨달은 홍 이사장은 2015년 딸 유지민 양과 함께 ‘지민이의 그곳에 쉽게 가고 싶다’란 제목으로 카카오 스토리펀딩을 진행했다. 딸과 함께 지하철과 버스 등으로 서울 곳곳을 다니는 영상을 만들어 교통약자가 겪는 문제를 지적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역무원이 아닌,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길을 더 잘 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펀딩 초기엔 지하에 교통약자를 위한 우회경로를 스티커로 표시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홍윤희 이사장이 자원봉사자들 앞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하철 역사 안에 시민이 표식을 붙이는 것은 불법이었다. 고민하던 그에게 김남형 계원예대 교수가 고객여정지도(Customer Journey Map)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이는 고객 경험을 차례대로 나열해 만든 시각 도구로, 매장 디자인 시 고객 동선을 설계하는 데도 활용된다. 이 형식으로 교통약자의 지하철 환승을 돕는 지도를 만들기로 했다.

“2016년 여름,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계원예대 학생들과 함께 14개 서울 지하철역을 돌면서 고객여정지도를 그렸어요. 그 뒤 4개 역을 추가해 2017년 2월 18개 역의 환승 지도를 공개했습니다.”

2017년에는 서울디자인재단과 협업해 시민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지도를 추가 제작했다. 현재는 33개 역 58개 구간이 무의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고, 2월 말에 지도를 업데이트해 총 44개 역 198개 구간이 될 예정이다.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비장애인과의 협업이다. 지하철 현장에서 비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환승 구간을 시작부터 끝까지 다녔다.

“비장애인이 직접 휠체어를 타봐야만 휠체어 눈높이로 보는 세상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 지도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캠페인이 되는 것이 목표였어요.”


구분이 필요 없는 디자인, UD

홍윤희 이사장과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 지도 제작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들.
앞서 언급한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같은 시설 디자인을 ‘유니버설 디자인(UD)’이라고 한다. UD는 장애 유무, 나이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말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막대 모양 문고리는 손힘을 덜 들이고도 동그란 문손잡이보다 훨씬 조작하기 쉬운 UD 시설이다.

홍 이사장은 이베이코리아 홍보팀 팀장으로, 소셜 임팩트 업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3년 전 옥션에 장애용품 코너 ‘케어플러스’를 만들었다. 점자 스마트워치 ‘닷워치’, 전동 휠체어 키트 ‘토도 드라이브’ 등이 케어플러스를 통해 판매됐다.

“무의의 슬로건 ‘Making disability sexier’가 의미하는 것처럼, 장애는 동정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다름의 하나예요. 케어플러스는 장애인이 제품·서비스 소비자로서 쇼핑할 수 있도록 관련 용품을 모아 만든 코너예요.”

지난해 12월 출시된 국내 최초 UD 의류 ‘모카썸 위드’는 이러한 케어플러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의류회사 ‘팬코’와 손잡고 2018년 5월부터 개발을 시작했으며, 한국척수장애인협회와도 회의를 거쳤다. 그 결과 단추와 지퍼 대신 벨크로 테이프를 다는 등 입고 벗기 쉬운 디자인이 나왔다.

“보통 이런 디자인의 의류를 ‘Adaptive clothing(장애인을 위해 디자인된 의류)’이라고 해요. 이보다 더 넓은 개념이 UD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만든 티셔츠는 앞쪽은 짧고 뒤쪽은 길어요. 휠체어를 타고 등을 구부렸을 때를 고려해 넣은 요소죠. 그런데 이는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디자인이에요.”

그는 주류 소비자가 아닌 가장자리에 있는 소비자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면 전체를 포용하는 디자인이 나온다고 말한다. 장애인만을 위한 의류가 아니라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바로 ‘모카썸 위드’다.

“우리가 늘 보는 디자인에 UD 요소를 적용하는 것도 중요해요. 작고 납작한 지퍼 손잡이에 긴 끈으로 된 장식을 달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이나 어린아이에게도 유용한 디자인이 되죠. 구분이 사라지는 겁니다.”


지도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을 위해

유니버설 디자인(UD) 의류 ‘모카썸 위드’. 상의는 앞쪽보다 뒤쪽이 더 길고, 입고 벗기 편하게 벨크로 테이프가 달려 있다.
많은 활동을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딸”이라고 답했다.

“아이의 정신적인 자유를 확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심이 많아요. 육체적인 자유가 제한되면 정신적인 자유도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죠. 제 활동을 통해 딸의 삶이 편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협업을 끌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쉽지 않은 일을 이어오면서 홍 이사장 역시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일에 임하는 자세는 ‘4C’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는 호기심(Curiosity),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Courage), 문제 해결을 위한 주변과의 협력(Collaboration),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끝까지 일을 끌어나갈 수 있는 꾸준함(Consistency)이다.

앞으로 무의에서는 지하철 지도의 양적 확대, 서울시 내 배리어 프리 문화시설 조사 등의 계획이 있지만, 홍 이사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도가 필요 없는 세상이다.

“UD가 곳곳에 있으면 굳이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관광지를 찾아갈 필요가 없듯이, 현장의 문제가 해결되면 지도를 볼 필요도 없죠. 지도로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도 지도가 필요 없는 환경을 조성해 결국 지도가 무의미해지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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