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라는 보증수표

글 : 이루신 자유기고가  / 사진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 사진 : 강영호 작가

1997년, 우리는 모두 당사자였다. 대한민국은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았고, 시중을 떠돌던 어음은 부도수표가 되어 기업과 가정을 쓰러뜨렸다. 결국 대규모 실직과 무더기 부동산 매각이라는 금융불안이 일어났고,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린다. 김혜수도 그 당시를 기억한다. 해외에 공부하러 나갔던 지인들이 줄이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촬영장의 분위기도 어두웠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함께 출연한 배우 허준호는 “잠시라도 현실을 잊고 싶었던 이들이 화려한 쇼 뮤지컬 공연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이어지는 줄도산 소식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별로 없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거나 일자리를 잃었다. ‘잠시라도 숨 쉴 공간’을 찾고 싶게 만들었다.

한국 경제는 IMF 관리체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IMF 이후 갑자기 노숙자가 늘었는데, 집 없이 떠돌며 거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는 거지와는 달랐다. 이들은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IMF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길 원했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 있는’ 기업만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일들이 모두 ‘당연’했을까?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 만들 거면 잘 만들자


한국 영화계에서 김혜수의 위치는 신용등급이 높다. 그만큼 많은 시나리오가 그를 찾아온다. 그는 조용한 곳에서, 편안한 자세로 자신을 찾아온 이야기들을 읽는다. <국가부도의 날>은 그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책을 읽었다. 시나리오를 덮은 다음에는, 심장이 무척 빨리 뛰었다고 했다.

“내가 출연하는지, 다른 배우가 이 역할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꼭 만들어져야 하는 영화였고, 만들어진다면 꼭 ‘잘 만들어야’ 하는 영화였죠.”

김혜수를 캐스팅 1순위로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소식이었다. 1997년 당시 가장 먼저 국가의 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서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외쳤던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김혜수가 주는 ‘신뢰의 힘’이 필요했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그 시대에 여성이 통화정책팀의 팀장이 되어서, 국가의 경제수장들을 설득하고, 투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아마 불가능했을 거예요. 다만 한시현은 성별로 상대와 대결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데이터와 분석력을 신념 삼아 일하는 프로라고 생각했어요.”

대부분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한시현의 존재는 일종의 판타지다. ‘당시에 그런 인물이 있었더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인물이다. 최국희 감독은 그 판타지를 현실처럼 믿게 해줄 인물이 ‘김혜수’였다고 말했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잖아요. 한국이 OECD에 가입했고, 아시아의 용으로 불렸고, 대출을 받아서 기업을 운영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국가가 부도가 났으니 다들 얼마나 충격에 빠졌겠어요. 그런데 그 부도의 직전까지 위기의 실체를 숨기려고 하죠.”

김혜수는 영화 크랭크업을 앞두고 4개월간 경제 공부에 매달렸다. 한시현이 하는 말들이 대사가 아니라 ‘말’이길 바랐다. 적어도 그가 이해하고, 믿는 만큼 말할 수 있다고 믿었다. IMF 총재 역을 맡은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과의 호흡을 위해서 영어로 된 대사는 상대방의 대사까지 모두 외웠다. 상대방이 하는 말도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공부할수록, 기가 막히는 날들이었다. 그 공부는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이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우리 영화의 목적은 분노가 아니에요. 무기력도 아니고요. 1997년에 있었던 일을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제대로 볼 수 있잖아요. 이 과거를 거울삼아서, 현재도 볼 수 있기를 바라요.”


연기하는 동안의 나는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개봉 2주 만에 관객 300만을 넘기며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로맨스도, 스릴러도, 통쾌한 반전도 없는 이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울린 건 ‘잘 만들어야 한다’는 제작진의 프로다운 신념이 낳은 결과다. 김혜수는 제작진 모두가 ‘한시현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작진은 “김혜수의 준비성과 철저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말한다. 그와 호흡을 맞춘 배우 조우진은 “내가 어떤 애드리브를 해도 다 받아주는 포용력 넓은 배우”라고 말했다. “연기는 액션만큼 리액션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해준 선배”라고 말이다.

“조우진 배우는 천재에 가까워요. 그가 가진 에너지와 아우라에 번번이 놀랐죠. 그런 배우를 현장에서 만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경이로워요. 유아인 배우는 제가 평소에도 좋아하는 배우인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더 좋아졌죠. 남자 배우로서 돋보일 수 있는 숱한 작품이 있는데, 우리 작품을 선택한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요.”

김혜수는 자신의 동료들을 칭찬하는 데 아낌이 없다. 늘 ‘근사하다’ ‘멋지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이번에 특별 출연한 뱅상 카셀과의 만남은 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무리 세계적인 배우라고 해도, 다른 팀이 깔아 둔 판에 혼자 들어와서 연기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도 긴장했지만, 우리도 긴장했죠. 그런데 현장에서 준비하는 모습은 우리와 똑같더라고요. 늘 먼저 와서 현장 분위기를 흡수하고, 항상 친절하게 모두를 대하고요. 외국어를 잘하는 친구든 아니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니다. 적어도, 연기하는 자신에게는 늘 엄격하다.

“평소의 저는 아주 느슨하고,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요. 하지만 연기는 아니에요.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연기라는 걸 할수록 알게 돼요. 저는 저를 좋아하는데(웃음) 연기할 때는 저를 좋아하기가 힘든 순간이 와요. ‘왜 이렇게 재능이 없을까’ 싶은 순간도 오고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던 날들이 있었다. 배우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함께 일하던 소속사 식구들에게 “평소에 송강호 오빠는 뭐하고 지낸대? (전)도연 씨는 어떻게 지내?”라고 묻기도 했다.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치열하게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연기라는 건 이제 안다.

“행복이라는 게 아주 찰나라는 걸 이제는 알잖아요. 연기하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연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에요. 작품을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관객들과 소통하는 건 여전히 뜻깊은 일이죠.”

그는 <국가부도의 날>을 마친 뒤 ‘관객과의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IMF를 지나온 관객의 사연을 들으며 함께 눈물짓기도 한다. 그가 눈물짓는 장면은 또 있었다. 김혜수가 1993년부터 진행해온 ‘청룡영화상’에서 김혜수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와 함께 진행한 배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혜수는 후보작을 모두 관람하고, 수상작과 수상자를 거론하는 멘트도 공들여 준비한다고 한다. 이번 영화상에서 <미쓰백>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한지민은 “끝으로 늘 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시는 김혜수 선배님, 늘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를 바라보며 현장에 나서는 후배들에게나 그를 바라보러 극장에 가는 관객들에게나 김혜수라는 존재는 참 고맙다.
  •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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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이병곤   ( 2019-01-02 ) 찬성 : 36 반대 : 3
이 여자배우 잘 보이게 만드려고, IMF 직전의 관료들과 정책결정자들을 똥으로 그렸구나..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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