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계의 김연아’ 지혜인

1000여 개 광고 접수한 ‘그녀 목소리’

글 : 안희찬 명예기자  / 사진 : 서경리

라디오를 들으며 학교에 가고 있었다. 긴 통학길에 지쳐 꾸벅꾸벅 잠에 빠져 있을 즈음, 라디오에서 울리는 청량한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저녁이 되어서도 그 목소리는 잊히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삼성 갤럭시, 현대자동차 코나, 카카오 등 1000여 개의 광고에 목소리를 녹여낸 10년 차 성우 지혜인(29).
요정 같은 외모로 ‘성우계의 김연아’로 불리는 주인공이다.
10월 초, 서울 삼성동에서 지혜인 성우와 마주 앉았다. 녹음을 마치고 왔다는 그는 성우 이야기에 앞서 배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영화 단역 엑스트라를 했습니다. 영화 〈이것이 법이다〉 한 신을 찍게 됐죠. 현장에서 감독님이 저한테 대사 한 줄을 줬어요. 상대 배우가 ‘경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물으면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해요!’라고 답하는 대사였어요. 어린 저에게 당시 상황은 신세계였습니다. 눈이 엄청나게 커졌죠. ‘우와~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면서요. 그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배우가 되기 위해 연극영화과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동시에 시간이 날 때마다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2008년, 영화 〈울학교 이티〉 오디션에 응시한 그는 이때 만난 친구를 통해 성우로 데뷔했다. 라디오 공익광고에 여자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지원하게 된 것. 당시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첫 녹음은 ‘국민참여재판’ 관련 콘텐츠였어요. 딸 역할로 참여했는데 생애 첫 녹음이라 그런지 모든 게 두려웠죠. 잔뜩 위축돼서 구부정한 자세로 인사한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녹음에 임했습니다. 다행히 잘 끝냈죠. 그 녹음 후 제 목소리 샘플 파일이 광고계에 돌았고, 개인적으로 연락이 많이 왔습니다. 성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죠.”

명지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지혜인은 오전에는 학업, 오후에는 성우, 밤에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바쁘게 살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당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 김연아가 출연한 광고의 후시 녹음을 맡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성우로서의 입지를 굳힌 그는 졸업 후 26세부터 전문 성우로 발을 내디뎠다.

업종과 장르 불문, 수많은 광고 및 내레이션에 참여한 그에게 유독 잊지 못할 광고가 있다. 보험회사와 함께한 캠페인 광고였다.

“말을 못하는 청각장애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분이 딸의 생일에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되잖아요. 소리공학 기계를 이용해 어머니의 신체 구조를 분석해 유사한 사람들을 찾고, 어머니께서 수화를 하면 그 기계가 목소리를 내주는, ‘엄마의 선물’을 주제로 한 캠페인이었습니다. 이 캠페인을 설명해주는 녹음을 하는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실제로 녹음할 때 감정이 주체되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일상의 기적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죠.”


연기 전공이 큰 도움


레진코믹스의 웹툰 〈우리사이느은〉 광고에서는 1인칭 시점의 목소리 연기로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처음으로 인물을 연기해봤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광고주들도 만족해하는 느낌을 받았고 저도 이런 연기에 욕심이 났습니다. 제가 주로 해온 내레이션 광고는 3인칭의 느낌을 요구할 때가 많아요. 물론 이것도 재미있지만 인물을 연기하면서 또 다른 재미를 느꼈습니다. 광고나 내레이션은 1시간에서 3시간 정도로 녹음 시간이 짧아요. 더빙의 경우 더 오랜 시간 녹음합니다. 연기할 캐릭터도 연구해야 하고 목도 더 많이 써야 하죠.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혜인의 목소리에는 긍정적인 힘이 있다. 경쾌하고 활기찬 그의 목소리는 다양한 콘셉트의 광고에서 빛을 발하며 대중에게 행복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성우가 아닌 연기를 전공한 점도 결과적으로 큰 힘이 됐다. 성우를 전공한 기존 성우들의 목소리와 차별화되어 꾸밈없는 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최근 광고계의 수요와도 맞아떨어진다. 이런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어렸을 때, 지금 목소리보다 앳되었을 때는 목소리가 짹짹거려서 광고에 안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오래 들으면 소음처럼 들린다는 말도 들었고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니까 어려웠던 점들이 정돈되면서 저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이게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대부분의 성우는 0세부터 100세까지의 목소리가 가능해요. 그래서 한 광고에 아기, 학생, 엄마, 할머니가 나올 경우 이 4명을 모두 커버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원 톤이라 10대부터 30대 초반 정도까지만 커버할 수 있어요. 연기 가능한 연령대를 넓혀가고 싶은 한편, 제가 가진 것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요. 잘 보존하면서 이 한계를 넘는 것이 숙제입니다.”

목을 많이 쓰는 성우이기에 그만의 목 관리 노하우가 궁금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튼튼한 성대’를 타고났다는 대답이었다. 초반에는 타고난 성대만 믿고 목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한다.

“올해 초, 마스크를 쓴 학생 무리를 봤습니다. ‘뭐지? 뭐지?’ 하며 주위를 둘러봤는데 근처에 성우 학원이 있더라고요. 목 보호를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녔던 거예요. ‘내가 성우로서 목 관리에 소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성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앞으로는 목 관리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제반려동물축제 홍보대사에 선정

지혜인은 반려동물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자칭 ‘집순이’인 그는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집에 있는 반려묘와 시간을 보낸다. 올해 5월엔 ‘2018 국제반려동물축제’의 홍보대사로 선정됐다. 그는 배우의 꿈도 놓지 않고 있다. 성우 일을 하며 틈틈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얼굴을 비친다. 영화 〈미안해, 고마워〉 〈검사외전〉, 드라마 〈시그널〉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인터뷰 내내 특유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이야기를 풀어낸 그는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SNS는 인스타그램만 합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를 보여주는 용도가 아니라, 제 일을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가끔 댓글이나 메시지로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제 목소리를 너무 잘 듣고 있다고. 저는 그저 제 일을 한 것뿐인데, 자신의 시간까지 쓰면서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책임감이 생기고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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