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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의 품격

“사슴을 보고 동정심이 생기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니다”

배우 안석환

안석환은 연우무대를 통해 1987년 데뷔했다. 무명(無名)의 기간이 8년도 더 된다.
열심히 해도 연봉 400만 원이 안 됐다. 부모에게는 “5년만 연극하고 안 되면 장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랬더니 ‘굶어 죽어 이 새끼야. 세상 물정 모르면서 지랄이야’는 욕을 얻어먹었단다.

사진제공 : 아시아문화원
배우 안석환(59)이 인상을 쓰면 주위를 얼어버리게 할 것 같다. 1997년작 연극 〈남자충동〉(조광화 연출)에서 맡았던 목포 깡패 ‘이장정’ 역 때문인지 모른다. 당시 그가 쓴 목포 사투리는 펄떡펄떡 살아있는 광어, 도다리였다.

“저거이 어릴 때 나가 업고 온금동 언덕 넘어 목마 태운 게 목 우서(위에서) 나 얼굴 꽉 겨안음시로, 나 성(형)이 참말 좋아라. 글던, 나가 까맣게 잊고 있던, 이쁘던, 그 달래여.”

여기서 ‘달래’는 자폐를 앓는 이장정의 동생. 이 연극에서 이장정은 목포 사투리로 친근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깡패세계를 그렸다.

“기왕 쑤실라믄 보스를 쑤셔야 않겄어. 그놈 집이 당당히 들어가서 조져분다 이거제. 기선을 잡어야 겁 묵고 까불지 못헐거잉만. 전쟁이사 조직이 클라믄 은젠가는 한번 치뤄야 헐 일잉게. 알 파치노도 그랬제….”

당시 이 연극은 ‘안석환=이장정=알 파치노=목포 사투리’가 한 몸이 되어 전년(연극 〈이 세상 끝〉)에 이어 1997~98년 연속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안석환에게 안겼다.

그런데 최근 안석환이 다시 사투리 연기에 도전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것도 셰익스피어의 고전 〈맥베스〉를 전라도 사투리로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안석환의 ‘사투리 맥베스’가 궁금해 지난 4월 광주로 내려갔다. 4월 14~16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er·ACC) 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맥베스 411〉을 앞두고 맹연습 중이었다. ‘411’은 고전 〈맥베스〉가 꼭 411년째라는 의미다.

“전라도 사투리로 〈맥베스〉를 한다? 전라도 말로 에럽죠. 이곳 분들이 ‘증말 저거이 아닌디?’ 하면 안 되는데….”

〈남자충동〉에서도 전라도 말을 하셨잖아요.

“그건 목포 사투리고, 〈맥베스 411〉은 광주 사투리입니다. 같은 호남 방언이라 생각하지만 목포, 광주, 전주 모두 말이 달라요.”

사투리로 연극의 비장미(悲壯美)를 표현하면 관객들이 피식 웃지 않을까.

“사투리에 대한 보통의 고정관념이 있어요. 전라도 말을 쓰는 극중 인물이 악역, 깡패, 범인이 아니면 코믹하게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반면 주인공이나 임금 같은 중요 배역은 서울 표준말을 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전라도 말로 긴장감과 비장미를 제대로 표현할까, 또 고정관념을 깰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사투리 맥베스’는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저요. ‘메이드 인 광주’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광주에선 광주 사투리로 연기하고 대구에선 경상도 방언으로 연기하는 게 지방과 중앙의 문화를 함께 살리는 길입니다. 제가 가끔 하는 말인데요, 지역 뉴스만은 지역말로 하면 어떨까요. 못 알아들으면 자막을 깔면 됩니다. 우리나라는 표준말 쓰는 대중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사실 안석환은 전라도가 아닌 경기도 파주 태생이다. 상고를 나와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시치미 떼고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무(無)연기’ 하기

안석환은 송능한 감독의 1997년작 영화 〈넘버3〉로 감초 조연 배우 이미지를 굳혔지만, 그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 역을 맡아 700회 가까이 공연을 마친 주연급 베테랑 배우이다. 대개는 강렬한 인상의 선 굵은 역을 주로 맡아 왔다. 어쩌면 조폭, 무뢰한, 악당으로 나올 때 더 인상적인지 모른다.

먼저 악역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어깨’들은 자기를 신격화해요. 말이 필요 없죠. 말하기 전 다 이뤄져야 합니다. 〈넘버3〉에서 제 첫 대사가 ‘담배 하나 줘라’ 였어요. 제가 그랬죠.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손가락을 브이(v) 자로 내미는 순간 (담배가) 꽂혀야 한다. 라이터 좀 줘 같은 말은 안 쓴다’고 했어요. 그래서 명령하는 대사를 다 지웠죠. 연기엔 액팅, 리액팅(상대 반응에 대한 연기)이 있는데 조폭 같은 악역은 액팅만 하면 됩니다. 리액팅이 필요 없어요.

연극 〈리처드 3세〉의 글로스터는 성격이 완전히 비뚤어진 ‘꼽추’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 형들을 다 죽이고 더 많은 힘을 갖기 위해 영주 딸을 빼앗죠. 그러곤 내버려요. 영주 부인에게 강제로 키스하고 딸을 달라 요구하는 악한이죠. 그런 악역을 연기하려면 힘이 엄청 들지만 매력 있어요. 어쩌면 관객도 그런 마음이 있거든요. 사람들이 악역에 왜 매료되느냐, 욕망 때문이죠. 똑같이 소유하고 싶거든요.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악역도 흔한 깡패처럼 연기하면 안 돼요. 그런 배역일수록 매력 있게 호기심을 유발시켜야 해요. 영화 〈배트맨〉 하면 ‘조커’를 떠올리듯 말입니다.”

악역의 심리는 어떻게 표현할까.

“‘사람의 심리’를 걷어내야 합니다. 호랑이가 사슴을 보면 동정심이 생길까요? 생긴다면 호랑이가 아니죠.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이미 늦어요. 동작 템포가 늦고 눈동자부터 흔들립니다. 짐승의 심리로 먹잇감을 봐야 ‘내 눈깔’이 달라집니다. 시치미 떼고,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무(無)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악역에 동정심이란 있을 수 없죠.”

‘만약 〈배트맨〉에서 조커 역을 맡게 된다면?’ 하고 물었더니 고민 끝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장애를 겪고 있는 조커… 몸의 반쪽을 못 쓰는, 뇌의 한쪽이 날아간 상태에서 세상의 절반을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조커, 어떤가요?”

그는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 〈오셀로〉의 이아고 같은 엄청난 악역을 저는 자유로 본다. 자유… 인간에겐 다 그런 면이 있다”고 했다.


‘외(外) 다수’에서 평론가의 주목을 받다


안석환은 연우무대를 통해 1987년 데뷔했으나 무명(無名)의 기간이 8년도 더 된다. 열심히 해도 연봉 400만 원이 안 됐다. 부모에게는 “5년만 연극하고 안 되면 장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랬더니 ‘굶어 죽어 이 새끼야. 세상 물정 모르면서 지랄이야’는 욕을 얻어먹었단다. 칼을 뽑았으니 물러나지 않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사슴 3마리, 거북이 2마리, 그 위에 비틀어진 소나무 한 그루, 두 그루… 데뷔 무렵이던 1990년 어느 날 제가 장롱에 그려진 십장생을 세고 있더군요. 또 어지러운 벽지 무늬를 할 일 없이 세고 있었어요. 하하하.”

그러다 출연하게 된 1991년작 연극 〈마술가게〉에서 재미없고, 배역도 비중이 낮은 ‘경비원’을 맡았다. 대사 분량을 다 합쳐야 3분을 넘지 못했다.

“심심해서 제 대사를 전부 더듬어 봤어요. 그랬더니 웃겼어요. 그다음에 대사 앞뒤로 ‘개새끼야’를 넣어 봤어요. 대본에도 없는…. 예를 들어 ‘밥 먹어’라는 대사를 ‘개새끼야, 밥 먹어, 개새끼야’라고. 그러니 대사가 3배나 늘고 거기다 더듬기까지 하니 5배 가까이 늘어난 거죠.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어요.… 거기다 제 맘대로 5분짜리 모노드라마까지 떡하니 붙였습니다.”

동료 배우나 연출가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반응이… ‘저런 새끼가 다 있나’고 했겠으나 받아줬어요. 너무 재미있고 그 인물에 딱 맞았거든요. 제가 웃긴데 슬프게 연기했어요. 짠하게… 마치 채플린처럼.”

그 무렵 대학로에 “이상한 ‘새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초창기 시절, 저는 ‘외(外) 다수’였어요. 누구누구 외 다수 말이에요. 그런데 평자들이 그냥 단역으로 처리할 걸 ‘경비원(안석환)’ 해놓고, ‘그의 연기는 어쩌고 저쩌고’ 하며 주목하는 게 아닙니까.

그 이듬해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에서도 잠깐 더듬는 연기를 썼어요. 그때 송강호가 연우무대에 들어왔나 그래요. 김윤석이 하고. 항간에는 (송)강호가 〈넘버3〉에서 한 더듬는 연기가 저를 카피한 거라고 하던데 제가 확인할 순 없지요.”

1994년 이후 연극과 영화에서 굵직한 섭외가 들어왔다. 그해 까다롭기로 소문난 임영웅 연출의 캐스팅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 연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도 그해 출연한 작품이다.

좋은 연기란?

“연극 〈마술가게〉도 그렇고 고정관념을 깨는 게 예술행위자의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기라면 연기가 아니죠. 그런 면에서 ‘예술과 과학은 거의 동격’입니다. 아니 예술은 과학보다 앞서요. 상상력에서 말이죠. 예술이 과학이 되고, 과학이 기술이 되고, 기술이 생활이 되잖아요. 연극판에 이런 말이 있어요. ‘Drama is not life(드라마는 생활이 아니다)’라고. 연기는 생활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잖아요.

그런데 배우들이 무대에서 ‘생활’을 하려고 해요.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말이죠. 맞지…. 자연스럽게 연기해야죠. 그럼에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기여야 합니다.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야 해요. 익숙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찍을 때 ‘기관원’ 역할을 맡았어요. 검은색 가죽점퍼와 선글라스라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그래서 장선우 감독에게 말했죠. ‘이 영화는 핑크다. 검은색이 아니다. 적어도 퍼플은 돼야 한다’고요. 제가 기관원을 ‘게이’로 갔던(표현했던) 거죠. 장 감독이 처음엔 펄쩍 뛰면서 ‘뭐야 안 돼’ 그랬는데, 못 이기는 척 받아줬어요. 그런데 그게 먹혔어요. 기관원을 여성적으로 바꾸니 재미가 배가 됐어요. 장 감독도 깔깔거리고 그랬어요.”


커튼콜 직전의 짧은 순간, 잊을 수 없어


연기의 왕도(王道)란?

“연기는 가르치고 배우는 게 아닙니다.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고 인생이 다르잖아요. 니가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다 다릅니다. 연기엔 법이 없어요.

굳이 조언한다면 배우 스스로 자신을 연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이가 자기 자신이죠. 본인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원래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아니었을까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죠. 제일 많이 공연했어요. 제 컴퓨터 로그인 아이디가 ‘에스트라공21’입니다. 다음으로 〈남자충동〉, 〈리처드 3세〉예요.

언젠가 세 작품의 배역을 짐승으로 표현한 일이 있어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 역을 할 때 모델로 삼은 동물이 사막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미어캣입니다. 왜 있잖아요, 개의 앞발처럼 두 손을 앞으로 구부리고, 혀는 축 늘어뜨리는… 미어캣이 에스트라공의 연기 폼입니다. 〈남자충동〉 이장정 역은 스라소니 같아요. 평소 게으른데 사냥할 때 민첩한…. 그 작은 놈이 사슴까지 잡아먹어요.

〈리처드 3세〉의 글로스터 공작은 하이에나입니다. ‘꼽추(척추 장애인)’인 글로스터는 모성결핍 환자인데 하이에나가 그래요. 모든 동물은 수컷이 왕인데 하이에나만 여왕 체제입니다. 새끼도 암컷을 배불리 먹이고 남으면 수컷을 줘요. 하이에나 암컷은 남성호르몬이 엄청 많아 남성 성기를 달고 나와요. 암수 구별이 어려워 유럽에선 ‘악마’로 인식돼 많이 죽였다고 해요.”

어떨 때 배우로서 가장 행복하세요.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할 때였어요. 커튼콜 직전의 에스트라공에서 안석환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순간을 즐겼어요. 속으로 ‘관객이 박수 치지 않기를…’, ‘그냥 에스트라공으로 머물렀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때가, 그 짧은 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 201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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