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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경험은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다

개관 5주년 맞은 노원휴먼라이브러리 허정숙 관장

글 : 임현선 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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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책이 되어 경험, 지혜, 지식을 나누도록 돕는 ‘휴먼북(human book)’ 도서관이 있다. 지난 3월 개관 5주년을 맞은 노원휴먼라이브러리는 상설로 운영되는 국내 최초의 ‘사람책 도서관’이다. 휴먼라이브러리 이용자들은 책 대신 휴먼북을 대출해 회당 50분씩 대화를 나눈다. 이곳에 휴먼북으로 등록된 허정숙(52) 관장은 월 1~2회 이용자들로부터 대출 신청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 노원휴먼라이브러리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살아 있는 도서관’

휴먼라이브러리는 2000년 덴마크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편견을 이기는 소통’을 목표로 펼친 이벤트로 등장했다. 행사 취지에 공감한 이들에 의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국내에서는 노원구에 상설 휴먼라이브러리가 처음 개관했다. 홈페이지에서 회원 가입을 하고 휴먼북 열람과 대출을 신청하면 휴먼라이브러리 근무자가 이용자와 휴먼북의 만남 일정을 조정한다. 현재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는 커뮤니티, 금융・재테크, 의료・보건, 언론・출판, 문화・예술・디자인, 복지・상담, 법조, 교육 등 20개 분야 703명의 휴먼북들이 대출 신청을 기다리고 있다. 영업, 종교, 정치 분야는 개관 초기부터 서비스에서 제외했다. 휴먼북의 구성원들은 ‘독학으로 영어 실력을 높이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10대 청소년부터 한국전쟁 등 직접 겪은 현대사를 들려주는 8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나의 경험은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습니다. 전문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남보다 앞서 체험한 이야기만 있으면 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나눈다는 취지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휴먼북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입니다.”

허 관장이 건넨 340쪽 분량의 《휴먼북 카탈로그》를 펼치니 주부, 마을활동가, 회사원, CEO, 의사, 간호사, 기자, 시인, 셰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휴먼북들이 한 쪽에 2명씩 소개돼 있었다. 인물 사진 옆에는 대화 분야와 주제, 대표 경력, 열람 가능한 횟수 등이 적혀 있었다.

“노원구에 살지 않아도 휴먼북 등록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국적, 학력, 나이, 성별 제한은 없습니다. 저와 실무자들의 면접과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활동하게 됩니다. 물질적 대가 없는 봉사활동이라서 중간에 그만두는 분도 있지만, 참여자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습니다.”

휴먼북과 이용자가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지난해 휴먼북 열람 건수는 7400여 건에 달했다. 허 관장은 “청소년들은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는 휴먼북을 만나고 싶어 하고 성인들은 건강, 마을활동, 요리, 교육 등에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지난해 청소년 사이에서 가장 열람 횟수가 많았던 휴먼북은 간호사였는데, 그분은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귀국 후 마을 간호사가 되었어요. 이처럼 독특한 경력자들에게 대출 신청이 자주 들어와요. 대출 현황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사회, 경제, 문화 트렌드를 알 수 있어요.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화제가 되었을 때는 군인 휴먼북 열람이 급증하기도 했어요.”

휴먼북을 열람하러 왔다가 자신을 휴먼북으로 등록하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 시절 휴먼북을 만나 진로 상담을 했던 이들이 성인이 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후배들의 진로를 상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최근에는 휴먼라이브러리의 운영 방식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분들과 일주일에 1~2회씩 만나고 있어요. 몇 년 전까지는 도서관 관계자들이 많이 왔는데 요즘은 기업, 인력개발기관, 노인복지관 등에서 자주 옵니다. 저희 기관을 위 세대가 쌓은 소중한 경험을 아래 세대가 잘 이어받을 수 있는 벤치마킹 대상으로 보고 자신이 소속한 조직에 응용하고 싶어 해요.”

허 관장은 휴먼라이브러리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관련 법 제정과 행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리처럼 상설로 휴먼라이브러리를 운영하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처음 가는 길이라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보람도 크다”고 했다.

“사람 한 명이 하나의 우주예요. 사람들을 만날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모든 인생이 귀하다는 확신이 강해져요. 휴먼북들은 자신의 인생 경험을 들어주는 이용자들에게 감사하다고 자주 말해요. 이용자들은 휴먼북들로부터 생생한 간접 경험의 기회를 얻지요.”

노원휴먼라이브러리는 휴먼북과 이용자가 만나기 전에 서로 꼭 지켜야 할 에티켓을 숙지시킨다. 휴먼북과 이용자의 열람(만남) 장소는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여야 할 것, 불쾌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분명히 밝힐 것, 전화번호 등 신상정보는 교환하지 않을 것, 약속 시간을 지킬 것 등이다. 한 명의 이용자가 같은 휴먼북을 세 번까지 열람할 수 있다.


‘따뜻한 공동체’를 위하여


경희대 성악과를 졸업한 후 20여 년간 지역 시민단체와 청소년센터에서 일한 허정숙 관장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육 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가수를 꿈꿨다. 가장 잘 부르고 좋아하는 곡은 ‘그리운 금강산’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청소년 시절에는 수녀가 될 생각도 했는데 음대에 진학한 후에는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졸업 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지역 공동체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엔 언제나 ‘나는 가수’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어요. 지금도 음반 낼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거든요(웃음). 삶의 역사가 담긴 노래를 하고 싶어요.”

허 관장은 가장 힘을 쏟는 일이 휴먼북 발굴이라고 했다. 동네 곳곳을 다니며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휴먼북 등록을 제안한다. 처음엔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무슨 휴먼북이냐”며 손사래를 쳤던 이들도 휴먼라이브러리의 운영 취지를 듣고 나면 슬며시 마음이 돌아선다. 허 관장의 노력에 힘입어 휴먼북 등록자 수가 크게 늘었고 휴먼북의 전문 분야도 더 다양해졌다. 아이를 잘 키우는 노하우,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휴먼북이 등장했다. 추석 등 명절을 앞둔 시기에는 명절 음식 잘 만드는 요리법을 전수하겠다고 나선 휴먼북도 있었다. 최근에는 웰다잉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원봉사를 경험한 휴먼북도 관심을 끌고 있다.

휴먼북이 늘면서 휴먼북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자율적으로 합창단, 연극 대본 읽기, 등산, 영화 감상 등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힘을 얻어요.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합니다. 세상에 좋은 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요. 해마다 엄청난 양의 책이 쏟아지고 온라인으로 유통하는 지식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사람의 온기가 더욱 그리워지는 시대예요. 우리 모두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고 위안을 주고받으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노원휴먼라이브러리가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 201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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