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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직업의 세계 / 영화 예고편 제작자

자료 : 고용정보원 직업연구센터
영화의 러닝타임은 점점 더 길어지는데, 예고편의 상영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진다. 지난 9월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러닝타임이 140분, 2시간 20분이다. 영화 예고편은 이 스토리를 2분 내외로 설명해야 한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출 것인가’는 영화 예고편 제작의 핵심이다. 이 과정은 협업을 통해 이뤄진다. 영화 제작사와 마케팅 부서와 함께 예고편의 콘셉트와 마케팅 전략을 협의하는 게 그 과정이다. 어떤 영화의 경우, 결정적 장면이 ‘스포일러(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장면에 대한 조율도 필요하다. 영화 예고편 제작자에게 감각만큼이나 협상, 조율 능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영화산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화 예고편 제작자는 유망 직종으로 분류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의 영화 예고편 제작업체는 소규모 창업 회사가 많아 공식 채용보다는 지인을 통한 소개나 추천이 많다. 별다른 자격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작업이 컴퓨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 파이널컷프로, 아비드 등을 다룰 줄 알면 좋다. 영화 관련 전공자가 진출하기에 유리하지만, 마케팅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마케팅, 광고, 미술, 디자인 전공자는 물론 인문학 전공자들도 많다.

영화 예고편 1세대는 조감독이 엔지(NG) 컷을 재미있게 편집하거나, 오케이(OK) 컷과 엔지 컷을 교차해 보여주는 형태였다. 이들은 예고편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끌기보다는, 말 그대로 곧 개봉할 영화를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중흥기와 함께 천만 영화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마케팅 업계도 치열해졌다. 영화 예고편 전문 제작업체들이 생겨나 대형 배급사와 손을 잡기 시작했고, 영화 예고편 역시 기획력과 아이디어, 완성도가 필요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현재의 제작업체는 2.5세대 혹은 3세대라 불린다. 도제식으로 교육받은 예고편 감독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갖고 예고편을 제작하고 있다. 다양성영화, 독립영화계에서 ‘느낌 있는’ 예고편을 만들어 온 ‘미스터쇼타임’ 예고편 제작팀은 “예고편의 상영 시간이 짧아지면서 영상이 점점 더 스타일리시해지고 직관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최근 〈범죄의 여왕〉 예고편을 제작했다. 미스터쇼타임의 김익진 대표는 “예고편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때문에 인간에 대한 관심과 트렌드에 대한 민감함이 필수다. 영화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장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첫 시작은 막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은 영화 안에 있다. 영화 예고편 제작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전공은 상관없다”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애정과 트렌드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평균 수입은 영화 관련 직업 중 높은 편이지만 업무의 강도가 높고, 야근도 잦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계의 숨은 공로자들이 최근 들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포스터 제작자, 예고편 제작감독 등이 그렇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전문직으로 인정받아온 직업이다. 한국에서도 전문 직종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김익진 감독은 언젠가는 미국에서 열리는 ‘골든 트레일러 어워드’처럼 “예고편 시상식도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 예고편 제작자 김익진 미스터쇼타임 대표

90초,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카운터펀치

영화가 여러 번의 잽과 펀치를 통해 관객에게 다가가는 복싱 경기라면, 예고편은 한 번의 카운터펀치로 보는 이의 마음을 녹다운시켜야 한다. 때문에 영화 예고편 제작자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인문학적 소양과, 트렌드를 읽는 리듬감이 두루 필요하다.

김익진 대표(가운데)와 함께 일하는 직원 조영수(왼쪽), 박동신 감독.
영화와 함께한 유년기

집에선 항상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 3편씩을 빌려다 보고, 밤에도 영화를 보다가 거실에서 주무셨다. 지금은 그게 나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비디오카메라로 사촌들과 함께 ‘도박하는 어른들’에 대한 영화를 찍기도 했다. 나름 사회 고발적인 영화였지만, 어머니께 등짝만 맞았다. 대학 때는 미셸 공드리(〈이터널 선샤인〉 감독,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다) 감독처럼 멋진 영상미가 있는 뮤직비디오를 찍고 싶기도 했다. 결국 내 길은 디자인이 아니라 영상 쪽이라는 걸 알았다.


예고편 제작자로서의 수련 과정

졸업 후 영화 예고편 제작 회사에 입사해 바닥부터 배웠다. 67시간 동안 2시간을 자며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수련 과정을 거친 뒤 독립 회사를 차렸다. 현재 우리의 위치는 영화 예고편 제작자 2.5세대 정도 된다. 1세대는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가 이를 편집해 예고편을 만들었다. 2세대는 대형 배급사와 자매격인 회사들이 생겨났다. 지금은 여러 회사에서 각자의 개성이 담긴 예고편을 만든다. 젊은 3세대들이다. 관객들의 눈이 높아져, 매서운 악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만큼 선플을 받았을 때 보람도 크다. 작년에 개봉한 〈소셜포비아〉의 경우 한 관객이 “이거 예고편 만든 분도 무대 인사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말을 SNS에 남겼다. 예고편을 보고, 영화를 찾는 관객이 많다. 이들이 바로 예고편의 보람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족구왕〉

미스터쇼타임에서 제작한 영화 예고편.
“저는 사실 50년 후의 미래에서 왔습니다. 저는 그때 직장암으로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만 싶습니다. (자막: 수상한 복학생이 나타났다) 바로 그때 한 천사가 제게 다가옵니다. 그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인생을 살았다면서 천국에 가서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저를 2013년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스물네 살 때로요. (여학생 대사: 족구하고 앉아 있네)”

그리고 만섭(안재홍)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안축으로 공을 찬다. 날아간 공은 벽에 동그란 인장을 새기고, 그 위에 새겨진 세 글자. ‘족.구.왕’. 지난해 만든 〈족구왕〉 티저 예고편이다. 영상의 분량은 고작 50초.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를 나열해 설명하기보다 인물의 대사를 통으로 따와 영상 위에 얹는 방식을 택했다. 놀랍게도 이 티저 예고편이 10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보통의 독립영화의 경우 티저 조회 수는 평균 1만~2만 정도다. 이렇게 입소문을 탄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정동진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결국 천만 관객 시대에 1만 관객을 목표로 만든 영화는 4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사실 이 티저는 모험이었다. 결국 〈족구왕〉은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됐다.


전공보다 중요한 건 적성


현재 홈페이지에 소개된, 올해 제작한 혹은 제작 중인 영화 예고편의 편수는 36편이다. 평균적으로는 한 달에 세 편 정도 된다. 6~7주 전에는 티저 예고편이, 3~4주 전에는 본예고편이 나와야 한다. 누구보다 빨리 영화의 영상을 보게 되는 게 영화 예고편 제작자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야근은 지양하고, 합리적인 근무시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영화 개봉이 겹치거나 빨리 결과물을 보여줘야 하는 경우에는 사무실이 숙소가 된다. 현재 미스터쇼타임에서 함께 작업 중인 인원은 세 사람. 막내 시절부터 함께하다 독립한 뒤 동료가 된 박동신 감독과 올해 초 ‘예고편 포트폴리오’를 들고 와 직접 문을 두드려 같은 배를 타게 된 막내 조영수다. 현재 미스터쇼타임에 근무하는 세 사람은 모두 전공이 다르다. 나는 디자인을, 박 감독은 신문방송학을, 막내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예고편을 제작하려면 기본적인 편집기술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전공보다 중요한 게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 여부다.


영화 볼 때 드러나는 직업병

예고편 작업은 장르와 국경을 넘나든다. 〈캐롤〉과 〈스포트라이트〉로 시작한 한 해는 〈태풍이 지나가고〉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지나 〈안녕 자두야〉를 거치는가 하면, 최근에는 액션 영화 〈대결〉과 부산영화제 개막작인 〈춘몽〉 작업도 진행 중이다. 예고편을 만드는 리듬감은 어느 영화나 필요하다. 원래는 액션이나 좀비물을 좋아하지만, 예고편을 만들면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취향이나 지평이 더 넓어졌다. 다양한 장르를 다루다 보면 다양한 돌파구가 생긴다. 두 작품의 예고편 작업이 동시에 돌아가는 경우에는 서로 다른 영화를 하면서 서로 막히는 부분을 뚫기도 한다. 이런 직업병은 관객으로 영화관을 찾았을 때도 예외 없이 발휘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예고편에 쓸 장면이 골라진다. 이 장면은 맨 앞에, 이 대사는 맨 뒤에 쓰면 좋겠다고 감이 온다. 다른 회사가 만든 것이라도 예고편을 보다 보면 전체 영화가 그려진다. 예고편에서 이런 장면을 보여주었다면, 이 장르는 어떤 쪽으로 흐를 것이라는 일종의 촉이다.


티저 예고편 vs 본예고편


예전엔 2분 30초가 기본이었는데, 점점 짧아지다가 지금은 1분 10초대까지 내려왔다. 영화관이라고 예고편만 틀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상업광고와 영화관에서 직접 제작한 영상이 영화의 앞을 채운다. 점점 스토리보다는 이미지와 느낌을 주는 쪽으로 가고 있다. 예고편은 본예고와 티저 예고로 나뉜다. 메인 예고편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티저 예고편은 ‘기-승-결’, 혹은 ‘기-결’로 이루어진다. 액션 영화라면 대사 없이 액션만 가지고 관객의 눈길을 훔칠 수도 있고, 영상미가 좋은 영화라면 예쁜 장면만 모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컷들이 일명 오케이 컷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 이런 오케이 컷이 20~30분 정도 모인다. 여기에서 추려낸 진짜배기들이 본예고편이 된다. 여기에 음원이 깔리고, 편집이 더해진다. 이렇게 수정 과정을 거쳐 컨펌을 받으면 후반 작업에 들어간다. 색 보정과 믹싱, 성우 더빙 등이다.


가장 공을 들이는 포인트

한국 영화 예고편이 백지 위에 그리는 그림이라면 외국 영화 예고편은 이미 그려진 그림을 수정하는 느낌이다. 나라마다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제작된 예고편을 한국적인 정서에 맞게 다듬는다. 예를 들어 영국식 예고편은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보여준다. 제3세계 영화 같은 경우에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없어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영화든 외국 영화든 예고편을 제작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 중 하나는 음악이다. 예고편은 음악에 민감한 편이라 음악을 고르는 데 제일 오래 걸린다. 영화에 사용된 배경음악이 쓰이는 경우보다, 영화에 어울릴 법한 음악을 새로 발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공들여 고른 음악이 인기를 얻으면 기분이 좋다. 최근에는 내털리 포트먼이 제작한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예고편 제작의 묘미다.
  •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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