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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연주하는 아티스트

직업의 세계 / 조향사

조향사는 향을 연주하는 아티스트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각 악기가 조화를 이뤄야 훌륭한 연주가 되는 것처럼 조향사는 각각의 향을 균형 있게 조합해 향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조향사는 다양한 향료를 섞어 새로운 향을 만드는 ‘향 전문가’다. 흔히 조향사라고 하면 향수를 떠올리는데 단순히 향수를 만드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화장품, 생활용품, 세탁용품 등에 향을 입히기도 하고, 껌, 음료수 등과 같은 식품에도 향을 입힌다.

향을 분석하고 평가해 새로운 향을 개발하기도 한다. 하는 일에 따라 조향사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는 퍼퓸 디자이너, 화장품이나 생활용품, 세탁용품 등에 향을 입히는 조향사는 퍼퓨머, 식품 향료 조향사는 플레이버리스트라고 한다.

조향사는 향을 처음 맡았을 때 느낀 향의 이미지를 정확히 기억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수천 가지가 넘는 향을 정확히 기억해야 향을 배합할 때 비율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향을 여러 번 반복해 맡으면 코가 쉽게 피로해지고 향에 대한 이미지를 놓칠 수도 있다. 향을 기억하고 판별하는 능력만큼 중요한 것은 원하는 향을 구현해내는 표현 능력이다. 조향은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창의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은 조향사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과거에는 조향사가 되기 위해 일본이나 유럽 등지에서 유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영동대, 중부대, 서원대 등에 조향학과, 화장품과학과, 향수학과, 화장품미용학과 등 관련 학과가 생겨 국내에서 조향사 교육을 받는 비율이 높아졌다.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조향사로 취업하는 데 유리하다. 학과 외에 사설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도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조향사 관련 국가자격증이나 국가기술자격증은 없다.

조향사는 주로 식품 회사, 화장품 회사, 향수 회사 등에서 향료 관련 부서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거나 개인에게 맞춤 향수를 만들어주는 개인 브랜드 향수 전문점을 운영한다.

2015년 산업통상자원부의 발표에 따르면 방향제, 항균, 탈취 등 국내 향기 제품의 시장 규모는 2조 5000억 원대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과거엔 주로 악취를 감추기 위해 향을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니치 향수(소량으로 생산하는 고급 향수), 디퓨저, 홈 프래그런스 등의 수요가 늘면서 향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변했다. 화장품 및 각종 제품의 개발 초기 단계부터 향기를 고려하고, 브랜드에서는 브랜드 고유의 향을 만들어 향 마케팅을 활용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업들이 조향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향은 치료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냄새는 뇌 신경세포를 자극해 새로운 연결 고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의 진행을 늦추거나 자폐아 치료에도 효과가 있을 정도로 향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조향사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살롱두파퓨메 운영하는 조향사 이성민, 윤재도, 김용진

스토리가 담긴 향기 만드는 세 남자

왼쪽부터 윤재도, 김용진, 이성민.
지난해 여름 서울 서촌 부근에 ‘살롱두파퓨메’라는 퍼품 숍이 문을 열었다. 이곳엔 각각 개인 브랜드 향수를 만드는 세 명의 남자 조향사가 있다. 향수가 연애의 아이콘이 돼 결혼한 이성민 씨, 드라마 속 조향사 역할에 매료돼 조향사의 꿈을 키운 윤재도 씨, 고등학교 때부터 조향사가 되고 싶었던 김용진 씨다. 8년 차 조향사 이성민 씨는 개인 브랜드 퍼퓸라이퍼(perfumelifer)를 만들었고, 윤재도 씨는 2013년 루이스(Louis)를, 김용진 씨는 2015년 가르니르(Garnir)란 개인 브랜드를 론칭했다.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이들은 이곳에서 개인 작업을 하지만 향수를 만드는 지향점은 같다. ‘단순히 맡기 좋은 향’보다 ‘개인의 가치관과 생각’이 담긴 향수를 만드는 것이다.


《topclass》 조향사가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성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연애 시절, 기념일이나 이벤트 때마다 향수는 가난한 커플에게 큰 활력소가 돼주었어요. 힘들 때 제게 위안이 되었던 향수가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향사를 꿈꾸게 됐죠.

김용진 고등학교 2학년 때 첫사랑과 헤어진 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여자 친구의 샴푸 향기였어요. 이 무렵 한 과학 잡지를 읽고 조향사란 직업을 알게 됐어요. 조향사가 되고 싶었지만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죠. 2006년 당시엔 향기 관련 전공이 개설된 대학이 없어 가장 밀접한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어요.
조향 관련 수업이 없어 국내의 사설 조향 아카데미에서 1년여 기본기를 익혔습니다. 천연향료, 단품 향료, 합성향료의 냄새를 기억하는 훈련으로 시작했어요. 단품 향료를 조합해 원하는 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했죠.


향으로 말하는 사람


《topclass》 향수를 만들 때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윤재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이나 음악, 그림, 감정, 추억, 사진 등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작곡가가 곡을 쓰듯 조향사는 향기로 작곡을 하는 셈이에요. 향수를 만드는 데 걸리는 기간은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즉흥곡을 쓰듯이 떠오른 향을 즉석에서 만들 때도 있고, 스토리부터 향의 원료까지 오랜 기간 구상하고 실험하며 만들기도 합니다.

《topclass》 향수를 만들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나요?

이성민 향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을 조합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직관이나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큽니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 시를 읽거나 음악, 미술, 전시 등 다양한 영역을 참고하며 상상력을 키웁니다.

김용진 좋은 향기를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좋은 향을 섞으면 되거든요. 개인 브랜드이기 때문에 단순히 맡기 좋은 대중적인 향보다는 모든 향에 ‘생각’과 ‘스토리’를 담아내려고 해요. 저는 고전소설을 주제로 한 향수를 만들어요. 소설의 상황, 분위기, 배경, 인물 등의 다양한 요소를 상상해 향으로 담아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주제로 ‘안나’라는 향수를 만들었어요. 안나의 건조한 삶에 찾아온 불꽃같은 사랑과 비극적 결말,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지고지순한 모습을 상상했어요. 안나의 건조하고 무기력했던 과거의 삶은 톱 노트에,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안나를 닮은 바이올렛 느낌은 미들 노트에, 사랑의 이중적인 모습은 머스크 향으로 라스트 노트에 담았습니다.

윤재도 향으로 풀어내는 감각도 중요해요. 머릿속에 수많은 포뮬러(향수 제조 공식)가 있어도 구현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포뮬러는 조향사 스스로 만들고 개척해가는 것이에요. 향의 조합, 비율, 농도 등을 고려해 다양한 향을 만들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topclass》 향의 원료인 소재를 찾는 것도 중요할 듯한데요.

이성민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를 모색하고 향의 조합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해요.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한국적인 느낌을 내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재료 가운데 어떤 것을 쓸 수 있는지, 어떤 향이 나는지, 천연으로 쓸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등을 연구하고 있어요.

《topclass》 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후각이 예민해야겠죠?

이성민 조향은 미리 머릿속으로 만든 향을 떠올려 만들어내는 작업이에요. 미세한 향을 조합해야 하기에 후각이 예민해야 해요. 후각 테스트를 거쳐 조향사를 선발하지만 그렇다고 타고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영어 단어를 외우듯 향의 이름만 보고 기억해내는 후각 트레이닝을 하면 후각이 발달할 수 있거든요.

김용진 민감한 후각을 유지하기 위해 늘 촉촉하게 가습기를 틀어놓고, 담배는 피우지 않아요. 조향사는 작업할 때 많은 향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는 체력도 중요하죠.


향의 문화를 만들다


《topclass》 조향사로 일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이성민 첫 향수를 만들었을 때 주위의 시선은 따가웠어요. 조향사라는 직업도 생소했고 개인이 만든 향수는 인지도가 없기 때문에 잘 안될 거라는 질타뿐이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브랜드 유무보다 향기가 삶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연구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음악이나 미술 작품이 청각과 시각적인 요소로 감동을 주는 것처럼 후각을 통해 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노래를 들었을 때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과 감성을 향으로 짚어내는 조향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topclass》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이성민 맞아요.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해요. 미술, 음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얘기도 나누죠. 또 다방면의 체험을 통해 느낀 것을 향에 담아 표현해내는 거죠. ‘그윽’한 향기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련’한 향기에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성을 떠올려 ‘아련하고, 그윽하고, 먹먹하고, 시큰한’ 이란 각 테마에 맞는 향수를 만들기도 했어요.


《topclass》 조향사로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김용진 제가 만든 향수를 뿌린 사람들로부터 ‘향수의 스토리가 향으로 느껴진다’ ‘위안이 됐다’는 얘길 들었을 때,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향수에 대해 물어볼 때 조향사로서 보람을 느껴요.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후각은 어떻게 작용하는지, 향기는 무엇인지, 조향사는 어떤 작업을 하는지, 향수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등 이곳을 찾는 분들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워요. 향수가 그저 치장의 개념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향기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지게 해주는 향수를 만들고 싶습니다.

《topclass》 세 분이 함께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윤재도 조향사라고 하면 “유학하셨어요?”라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조향사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아요. 저희 셋 다 처음 조향사가 되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유학만 떠올렸었어요. 조향사 지망생들이 조금 더 쉽게 입문할 수 있는 조향 학교와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조향 고등학교를 만들어 졸업과 동시에 조향사로 활동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게 꿈이에요. 일반인을 위한 조향 아카데미의 경우 교육 수료 후 개인 브랜드 론칭부터 유통까지 지원할 계획입니다.
  • 201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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