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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축소판 ‘바둑’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 사람들

직업의 세계 / 프로바둑기사

참고도서 : 《미생》(위즈덤하우스), 《열려라 바둑》(바둑TV)
바둑판은 가로 19줄, 세로 19줄, 전체 361목으로 짜여 있다. 가로는 42cm, 세로는 45cm다. 그런데 이 판 위에는 단 한 번도 같은 수가 펼쳐지지 않는다. 놓는 돌에 따라 기보가 달라진다.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활로가 열리기도 하고, 무심코 놓은 돌이 패착이 되어 판세를 뒤집기도 한다.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 부르는 건 그래서다.

한국은 중국처럼 바둑 종주국도, 일본처럼 바둑 장려국도 아니었다. 아시아 바둑계에서 한국은 그야 말로 미생(未生, 아직 살아 있지 않은 돌)이었다. 1988년 아시아의 고수들이 모인 응씨배 바둑대회에서 조훈현 9단이 중국의 바둑 천재 녜웨이핑과 맞붙어 승리를 거둔다. 세계 랭킹 1위의 녜웨이핑이 변방의 바둑기사 조훈현에게 무릎을 꿇자 세계 바둑의 대세가 바뀌었다. 변방의 한국이 중원을 차지하게 됐다. 한국 바둑계에 중흥기가 열린 것도 이때부터다.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만화 《미생》은 이 장면으로 포문을 연다. 윤 작가는 매회 조훈현과 녜워이핑의 경기 기보를 첫 장에 실어 이 경기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한국 바둑은 조훈현이 포석을 놓았고, 이창호가 회도리치기(연단수로 몰아치는 공격을 말하는 바둑용어)를 했다. 이창호는 11세에 프로기사로 입단한 후 17세에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거뒀고, 이후 2002년까지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박세리 이후 골프키즈가, 김연아 이후 피겨키즈가 생긴 것처럼 이창호 이후 바둑키즈들이 육성되기 시작했다.

바둑키즈가 프로 바둑기사가 되려면 ‘바늘구멍’ 같은 입단대회를 통과해야 한다. 최근에는 방과후 학습 등에서 바둑을 배우려는 수요가 늘고 있어 바둑을 배우는 어린이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1년 동안 프로기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9명. 남자 7명, 여자 2명이 전부다. 아마추어 과정을 지나 한국기원에서 여는 프로기사 선발전을 치른다. 프로기사들은 입단대회를 ‘지옥문’으로 표현한다. 보통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선 대국에 임하는데 프로의 관문을 통과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숱한 ‘장그래’들이 쏟아져 나온다. 프로기사가 되기 전에 거쳐야 하는 관문도 있다. 한국기원 연구원이다. 연구원을 통하지 않고 ‘야인’으로 입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전국의 ‘바둑 천재’들이 연구생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국기원 연구원은 1년에 3~4회 연구생을 선발한다. 연구원이 되면 바둑 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명지대 등 일부 대학에 바둑학과가 개설돼 있는데, 바둑학 개론부터 정석, 끝내기, 계산법, 이론 등을 배운다. 최근에는 한국 바둑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러시아, 유럽, 동남아 등에서 바둑 유학을 오는 경우도 생겼다.

프로 바둑기사는 보통 기전에서 대국을 한다. 이때 받는 상금이 프로기사의 주 수입원이다. 바둑기사의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랭킹 1위를 기록하는 기사는 연간 10억원의 상금 수입을 올리기도 하고, 랭킹 30위 이하는 평균 4000만원 이하로 집계되기도 한다. 지난해 14억원을 번 이세돌 9단은 수입 1위에 올랐다. 일부 프로 바둑기사는 바둑전문 잡지나 교재 등을 만들기도 한다. 이다혜 프로기사가 쓴 《열려라 바둑》 등이 대표적인 입문서다. 바둑 대국 방송에 출연해 대국을 해설하기도 하고, 바둑 교실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다.



‘꽃보다 바둑센터’ 개원한 배윤진·문도원 프로

바둑 두는 여성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기원’ 하면 떠오르는 풍경,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마주 앉아 바둑돌을 놓고 한쪽에서는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은 이곳에 없다. 2014년 8월 서울 충무로에 문을 연 ‘꽃보다 바둑센터’는 바둑을 접할 기회가 없는 입문자, 특히 성인 여성을 위해 연 공간이다. 바둑의 대중화를 위해 여자 프로기사들이 의기투합했다. 배윤진·문도원 프로기사를 만났다.

배윤진(왼쪽), 문도원 프로.
취미로 시작해 인생이 되다
처음부터 기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뜻에 따라 창의력, 집중력, 인내력을 기르기 위해 취미로 시작했다. 당시 이창호 9단의 열기도 한몫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바둑을 하면 보통 15~18세 때 프로기사가 된다. 최근에는 입단하려는 사람이 많아져 경쟁률도 높아지고, 연령대도 높아졌다. 여자의 경우 한 해에 2명을 뽑는다. 예선전부터 바둑을 둬서 최후의 승자 한 사람이 남는다. 이런 식으로 한 명은 대회로 뽑고, 또 한 명은 한국기원 연구생 중에 뽑는다. 연구원은 연예인으로 보자면 연습생 개념이다. 프로로 데뷔하기 전까지 연구원은 주말마다 리그전을 한다.
그중 가장 성적이 좋은 연구생이 프로가 된다. 상위권으로 올수록 실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운이 따라야 한다. 늘 문턱에서 좌절되는 사람도 있다. 《미생》의 장그래가 그런 케이스다.


생활 속으로 찾아가는 바둑
바둑 한 경기에 7~8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초반의 집중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 바둑기사 중에는 복싱·헬스 등으로 체력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바둑도 스포츠이긴 하지만 ‘두뇌’ 스포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는 전국체전에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바둑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최근에는 학원뿐 아니라 방과후 수업에서도 바둑이 인기가 많다. 여자 프로바둑기사와 50대 이상의 시니어 기사가 겨루는 대회도 인기를 끌고 있다. 2014년 한 대회에서는 여성기사 대 시니어 연승대항전으로 12명씩 출전해 여성팀이 시니어 선수를 이겨 화제가 됐다.

여자를 위한 바둑
꽃보다 바둑센터는 ‘꽃보다 바둑’을 원하는 여자 기사들이 모였다. 여성 바둑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많은 숫자가 아니라 워낙 잘 알고 두루 친하다. 지난해에는 ‘별에서 온 바둑’이라는 행사를 했다. 문도원 기사처럼 현역으로 활동 중인 20대 기사들은 다양한 대회를 열어 바둑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쓴다. 지난해에는 광화문에서 한복을 입고 다면기(한 명의 기사가 여러 명의 상대와 번갈아 싸우는 일)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일반인에게 바둑에 대한 인지도가 낮고, 문턱이 높은 것이 프로기사들에게는 숙제다. 특히 성인 여성이 바둑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 최근에야 드라마 〈미생〉이 인기를 끌면서 이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바둑은 자기와의 싸움
바둑을 가르치다 보면 신기하다. 아무도 같은 바둑을 두지 않는다. 바둑에 그 사람의 성품이 묻어난다. 특히 사심 없이, 이기려는 욕심 없이 바둑돌을 놓는 사람은 창의적이고 유연한 수를 둔다. 프로기사 중에도 전투형 바둑을 두는 사람이 있고, 수비형으로 두는 사람이 있다. 실수가 없는 바둑은 없다. 실수를 줄여가는 과정을 배울 뿐이다. 복기를 하는 이유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영화 〈신의 한 수〉의 대사처럼 어린아이의 바둑은 유연하다. 프로의 경우는 살면서 한두 번 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늘 준비가 필요하다. 이때 섣부른 위로는 금물이다.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바둑은 끝까지 자기와의 싸움이다.

마음 수련이 먼저다
바둑을 하는 사람들은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좀 듣는다.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대부분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이 많다. 마인드 컨트롤 하는 습관이 몸에 배서 그렇다. 실제로 심리 상태에 따라 바둑의 내용이 달라진다. 마음을 비우면 오히려 수가 빨리 읽히고, 잘 보인다. 배윤진 기사는 한 대회가 있던 전날, 아이가 집에서 전기밥솥 증기에 데인 일이 있었다. 응급실에 데려가 치료받는 걸 끝까지 보지 못하고 대회에 임했다. 자칫하면 아이의 손이 잘못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경기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행히 아이는 별탈 없이 치료했지만, 바둑경기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바둑의 활로를 열기 위해서
‘미생(未生)’이라는 단어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생소한 단어다. 바둑은 집싸움인데 미생은 ‘아직 집을 이루지 못한 말’이다. 이는 자칫 죽은 돌이 되거나 상대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위태로운 상태를 뜻한다. 완생이 될지, 사석(死石)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평소에 자주 쓰는 말들도 바둑용어인 경우가 많다. ‘사활’을 건다는 말은, 완생하지 못한 고립된 돌끼리 싸우는 모습을 말한다. 이때 ‘활로’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바둑기사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이 온다. 계속 프로로 대회에 나갈 것인가, 아니면 후진을 양성하고 바둑을 보급하는 데 힘쓸 것인가. 배윤진 기사는 현재 바둑 강의에 주력하고 있다. 방송이든 군대든 바둑을 원하는 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간다. 아이는 올해 세 살이 됐다. 워킹맘인 그는 다른 직업에 비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최고 경지는 9단
프로기사를 부를 때 단수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배윤진 3단, 문도원 3단… 이런 식이다. 단은 승급될 때마다 올라간다. 최고의 경지는 9단, 현재 한국에는 30명 정도 있다. 예전에는 승단대회가 있었다. 규정이 바뀐 뒤로는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3단, 국내대회 우승자는 1단, 이런 식으로 승단한다. 현재는 전체 기사가 참여하는 전체 기전을 기준으로 본선 대국을 일정 단위 이상 이겨야 승단한다. 문도원 기사가 지금도 열심히 대회에 참여하는 이유다.
  • 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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