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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끊임없이 가로질러 길을 만드는 사람

직업의 세계 / 번역가

참고도서 : 《번역에 살고 죽고》(마음산책)
번역가는 외국어로 쓰인 문서, 전문서적, 영상물 등을 우리말로 옮기거나 또는 외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저울에 비교한다면 한쪽엔 외국어를 다른 한쪽엔 모국어를 올려 수평을 맞춘다. 문학 번역을 예로 들면 원작을 집필한 작가와 다른 언어권의 독자를 이어주는 중간자의 역할인 셈이다. 외국작가의 책이 번역돼 베스트셀러에 올라도 번역가의 존재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것은 번역가만의 능력이다. 단순히 외국어를 모국어로 정확하게 옮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번역가는 외국어만 잘해선 안 된다. 독해와 번역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외국어 특유의 표현이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군더더기가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번역문으로는 낙제점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옮기는 요령이 중요하다. 소설 번역을 예로 들면 등장인물의 캐릭터, 관계, 신조어, 배경 파악, 사투리는 어떻게 옮길 것인가 등의 디테일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번역가는 그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번역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자격요건은 없다. 전공뿐 아니라 성별, 나이도 제한이 없다. 그러나 높은 어학수준과 문장력, 표현력, 외국 문화와 정서에 대한 관심, 번역하고자 하는 영역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어야 한다.

번역가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유학을 꼭 다녀와야 하나요?”다. 현역 번역가 중에는 유학을 하지 않고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 그 나라의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접하면 간접적으로 문화를 경험할 수 있고, 젊은이들의 은어나 신조어 등도 접할 수 있다는 것. 이보다 중요한 건 자신은 원문을 이해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실력이 되는가, 책읽기를 좋아하는가, 글을 잘 쓰는가, 완성도 높은 양질의 번역을 위한 꼼꼼한 성격과 끈기, 인내심이 있는가, 편집자·출판관계자들과 원만하게 지낼 사교성이 있는가, 자신의 성향과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번역료 또한 학력이나 유학 경험 여부가 아니라 오로지 실력과 경력으로 결정된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는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발전된 이웃 문화를 배우거나 혹은 고대 언어로 된 고전을 읽는 데에는 결국 번역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와 불경,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작품, 공자와 노자의 사상 등 고전은 대부분 번역을 통해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발전 이전에 우선 남의 것을 배우는 번역의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대작가로 알고 있는 프루스트, 카뮈, 루소, 지드 등도 모두 번역에 많은 공을 들였다. 번역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보다 어쩌면 더 치열한 작업이다.



번역가 권남희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자유로움에 이끌리다

〈topclass〉는 20여 년간 일본문학을 번역해온 베테랑 번역가인 권남희씨를 만났다. 그는 온다 리쿠,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미우라 시온 등 일본 유명 작가의 작품들을 번역하며 이름을 알렸다. 권씨는 일본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번역가로 통한다. 그가 번역한 작품을 찾아 읽는 팬 층도 형성됐다.


번역은 내 운명
일본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 한동안 다른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일본소설의 묘한 매력에 빠졌다. 대학 진학 때 일본어를 선택했는데, 그것이 내 인생의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우연히 지인의 권유로 장편소설을 대리번역했는데, 출판사 사장이 결과물을 보고 “이렇게 빨리, 이렇게 매끄럽게 잘하다니”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때 어렴풋이 ‘이게 내 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번역하고 싶을 만큼 그 일이 즐거웠다. 일본소설을 번역하는 일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기획거리 찾으러 일본으로
1990년대 초반 번역가들이 보통 200자 원고지 1장당 번역료를 2300원 받을 때 600원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거리가 없어 직접 일본에 가서 도쿄의 대형 서점과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잔뜩 사왔다. 당시 사온 책 중에는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시마다 마시이코 등 지금은 국내에서도 베스트로 꼽히는 유명 작가의 소설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출판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후 일본 에세이집에서 글을 골라 이른바 짜깁기 책을 내기도 하고, 《동경신혼일기》라는 책을 쓰면서 초보 번역가의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이와이 지 《러브레터》, 무라카미 류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등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본격적인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됐다.

작업 스타일
책을 미리 읽고 번역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각각 장단점이 있다. 책이 재미있어 보이거나 너무 어려워 보일 땐 미리 읽는 편이다. 미리 읽고 번역을 하면 내용을 통째로 파악하고 있으니 번역하기 수월하나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일하는 재미가 덜하다. 이미 본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기분이랄까. 읽지 않고 번역을 하면 그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흥미진진하게 번역을 할 수 있고, 속도도 빨라진다. 그렇지만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간혹 실수하기도 한다. 원고지 30매쯤 일 하면 슬슬 지루해진다. 잠시 쉬면서 베란다에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단어가 방전됐다 싶을 땐 국내소설을 읽으며 충전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띄어쓰기 하나까지 마치 씹어 먹는 영양제를 먹듯 꼭꼭 씹어가면서 읽는다. 가끔 같은 방법으로 다른 역자가 번역한 일본소설을 읽기도 한다. 더러 독서를 위한 독서를 하고 싶은데 번역을 한 후론 모든 문장을 해체하며 읽는 버릇이 생겼다.


번역가는 ‘바람둥이’
200여 권이 넘는 책을 번역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이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한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작가”라고. 아무리 작품에 반해서 꺅꺅거려도 마감만 하면 끝. 금세 새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요즘은 작가 마스다 미리에게 빠져 있다. 2014년에 마스다 미리 《여자라는 생물》 외 여섯 작품을 번역했는데 그냥 여자들끼리 수다 떠는 듯한 특별한 즐거움이 있었다. 번역한다기보다 내 얘기를 쓰는 것 같은 편안함이랄까? 기회가 되면 꼭 밤새워 수다를 떨고 싶은 작가다.

번역가의 과제
어떤 번역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오역이 없는 것. 그다음은 역자마다 취향이 다르므로 최대한 원문을 살려서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트에서 파는 생선처럼 깨끗이 씻고 다듬고 토막 내서 먹기 좋게 내놓는 번역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면 나는 그와 반대다. 생선은 생선이니까 그렇게 다듬어도 원래의 모습을 누구나 다 알지만, 번역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조금 매끄럽지 않더라도 작가가 쓴 단어를 되도록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일본소설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데, 국내소설처럼 너무 매끄러운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책을 번역한 다른 사람의 번역을 보고 원문 훼손이 심해서 몹시 화가 났던 적이 있다. 작가의 단어를 최대한 버리지 않으면서 매끄럽게 번역하는 것이 번역가의 과제일 것이다.


어려운 작품과 맞닥뜨릴 때
가끔 서평에서 “옮긴이가 권남희라서 일단 이 책을 믿고 골랐다”는 글을 볼 때가 있다. 얼핏 좋은 말 같지만 조심스럽기도 하다. 이런 분들이 하필 망작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권남희 옮김은 절대로 사지 말아야지”가 될 테니 말이다. 1년에 한두 권은 욕하면서 번역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독자도 “이게 무슨 소리야?” 할 정도로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책이나 작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이 독자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하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가끔 망작을 만날 때면 역자 후기에 독자와 나만 아는 암호라도 남기고 싶은 심정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본 작가
200여 권의 번역서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2004년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빵가게 재습격》(문학동네) 번역 의뢰가 들어왔을 때 기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10년간 이 책이 재출간될 때마다 교정을 보고 있지만, 볼 때마다 하루키식 유머에 웃고, 그의 문장에 감탄한다. 2012년 에세이집 《라디오 시리즈》(비채)도 즐거운 작업이었는데 60대의 여유 넘치는 하루키를 느낄 수 있는 글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다시 태어나도 번역가
외국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한자 한자 정성껏 옮겨놓으면 어느 날 예쁜 책이 되어 서점에 진열되어 있다. 일한 결과물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책이 되어 남아 좋다. 세월과 함께 책장에 늘어나는 번역서를 보며 ‘저 책이 나오던 해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과거를 여행하는 사소한 재미도 이 직업의 즐거움이다. 늘 작가에 가려진 자리 같지만 작가의 생각, 작가가 선택한 단어와 메시지를 독자에게 잘 전달하는 것 또한 역자의 능력이다. 손가락이 굳기 전까지 기꺼이 훌륭한 작가의 들러리 역자로 남을 것이다. 감동적인 작품을 번역할 때 희열을 느끼고, 궁합 맞는 작가의 글을 옮기며 마치 내가 쓴 글을 옮기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 2015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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