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人]
떠난 가족들 생각하며 ‘아름다운 나눔’ 실천하는 송만순씨

이 사람이 비극을 극복하는 법

글 : 이선주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아들 결혼을 앞두고 아내, 삼남매 등 다섯 식구가 함께 떠난 가족여행.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기에는 다섯 식구 중 큰딸과 그, 두 사람밖에 없었다.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아들, 막내딸이 한꺼번에 숨진 것이다.
“제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보고 어쩌라는 말이십니까?” 절대자에게 묻고 또 묻었다.
그는 요즘 아내와 아들, 딸이 이 땅에 남기고 떠난 뜻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 죽음 후 나온 보상금과 보험금을 한 푼도 손대지 않고 이웃을 돌보는 데 쓰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책(《인생 2막》)을 펴낸 송만순씨를 만났다.
“2006년 여름, 사고가 났을 때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통곡이라도 실컷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았어요. 사고 당시에는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가족들의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는데, 장례식이 끝나고나니 잠도 잘 수 없고 별별 생각으로 괴로웠습니다. 편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온몸까지 아픈 증상은 명상 수련을 통해 극복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헝클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파일 정리가 안 된 컴퓨터, 어질러진 방 같았죠.”

그는 사고 당시의 기억을 글로 옮기면서 몇 날 며칠을 펑펑 울었다고 한다. 가슴속 켜켜이 쌓인 상처들을 쏟아내 달래고 보듬고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그러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필름처럼 펼쳐졌다. 처음에는 그렇게 정리한 글로 400~500권 책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글을 본 출판사 대표가 “정식으로 출판하자”고 그를 설득했다.

“‘내가 회고록을 낼 만한 사람인가?’ 하는 회의, ‘벌거벗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같은 부끄러움’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제 글을 통해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에 용기를 냈지요. 끔찍한 사고 후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던 그 순간, 살아야 할 목표, 사명감을 찾지 못했다면 저도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1968년, 건설부 국토계획국 건설경제과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우리나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데 초석을 놓은 건설역군이자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가족애가 극진한 ‘우리 아버지의 초상’이었다. 1976년 신설된 항만청으로 옮겨간 그는 제주・묵호・군산・인천・부산 등 전국을 누비며 항만 전문가가 되었다. 탁월한 아이디어로 2001년과 2002년 연이어 ‘예산절감 공무원’으로 뽑혀 정부 포상을 받았고, 2004년에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리모델링에 의한 항만의 효율적 개발방안 연구〉로 공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노후화된 항만에 리모델링 개념을 도입, 기존시설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쾌적하고 친환경적인 항만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인데, 현재 부산역 옆에 있는 부산북항 재개발 사업이 그가 박사논문에서 제시한 콘셉트대로 리모델링되고 있다. 부산 신항만 건설 때는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어민들의 보상문제가 커다란 난제였는데, 그는 어민들의 마음 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의 고충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3년간 질질 끌던 어업권 보상문제가 마무리되었는데, 해양수산부 기술안전과장으로 발령이 나 서울로 와서 근무하던 그를 어민들이 찾아왔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감사패와 꽁치 한 상자를 들고 온 것이다. 요즘도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항만 그리고 해안 관련 학회나 협회 일에 적극 참여하면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사망한 그의 아내는 국가 공무원으로 열정을 다하는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뒷바라지하는 아내이자, 좋은 엄마였다.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할 정도로 성장하자 아내는 ‘봉사하는 삶’을 꿈꿨다.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아내는 사회복지사, 케어복지사, 어린이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아이들과 어르신 돌보는 일을 같이 해보고 싶다”고 했다. “당신도 은퇴하고나면 나와 함께 봉사하면서 살자”고 권유했다.

“사고 후 보상금과 보험금이 나왔는데, 어떻게 내가 그 돈에 손을 댈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 가족들의 피 값인데. 그들을 기억할 수 있게, 의미 있게 쓰고 싶어서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아내가 생전에 소망했던 사회복지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딸도 ‘아빠 생각 잘하셨어요. 저희도 동참하고, 그 뜻을 이어나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회복지법인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이름을 지어 놓았는데, 사회복지법인 등록은 절차나 요건이 너무 복잡해 2008년 8월, 일단 사단법인으로 출발했다.

“우선 독거노인과 장애인, 불우청소년을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형식으로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생활형편이 열악한 홀몸 노인 중 국가로부터 지원받지 못하는 차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쌀과 반찬 등을 지원했는데, 저희가 찾아가면 가지고 간 물건보다 사람을 더 반기셨어요. 그만큼 외로우신 거죠. 그분들을 만나면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저절로 떠올라요. 자식이 없으면 국가로부터 지원이라도 받을 텐데, 찾아오지도 않는 자식 때문에 지원조차 받지 못하니까요. 병원비 등 현금이 절실한 상황이라 현금 지원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사업 역시 국가 보조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 돌봄 단체를 후원합니다. 우리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지요. 또 가출청소년을 돌보는 ‘십대지기’라는 단체도 후원합니다.”


‘아름다운 나눔’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남미 파라과이까지 사랑의 손길을 뻗었다.

“죽은 아들이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으로 파라과이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친구와 주고받은 메일을 보게 되었어요. 아들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서 학교 짓는 일을 후원하고 있었지요. 그곳 컴퓨터 교실에서 쓸 컴퓨터를 지원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컴퓨터 교실에 아들 이름이 붙어 있다 합니다.”

대학을 다니다 꿈을 펼치기도 전에 스러져간 막내딸을 위해서는 딸이 다녔던 학교에 매년 일정 금액을 내놓고 있다.

“처음에는 원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그 이자로 사업을 진행해왔는데,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재원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상가를 두 군데 분양받아 임대수익을 활용하려 했는데, 한 군데는 임대가 잘 안 되어 대출이자만 물고 있어요. 이 문제가 해결되어 안정적인 수익금이 생기면 복지사업을 조금 더 확장하려 합니다. 도와야 할 대상은 많은데, 조금밖에 못하는 게 안타깝지요.”

끔찍한 비극을 그와 함께 헤쳐 나온 맏딸 송영빈씨. 사고 직후 아버지에게 “이제, 아빠하고 저하고 씩씩하게 열심히 살아야죠”라고 했던 딸은 “제가 무너지면 아버지도 무너지실 것만 같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왜 살아야 하나’ 우울감에 빠질 때는 “아버지가 제 곁에 계셔 주셨기에, 살아남으셨기에 저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두 사람만 있을 때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던 사고 이야기. 그는 “아버지가 그 일을 글로 펴내면서 제 응어리도 풀어주셨다”고 한다. 영빈 씨는 현재 세 자녀의 엄마이자 식약처 공무원으로 철도 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 그리고 송만순씨에 이어 ‘공무원 3대’를 기록하고 있다.

송만순씨는 요즘 새로 맞은 아내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제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새 마누라 얻어 잘 산다’고 쉽게 말합니다. 사고 후 밥 한 숟가락 입에 넣는 것도 죄스러운 마음이었는데 어찌 제가 행복을 꿈꿀 수 있었겠어요? 재혼은 생각도 안 했죠. 그런데 이상하죠? 누구의 위로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명상 수련을 하면서 만난 아내의 말은 위로가 되는 거예요.”

딸의 결혼을 앞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라’는 뜻에서 그는 지금의 아내를 딸에게 소개했다. 새 아내와 딸은 이제 모녀 같은 사이가 되었고, 새 아내는 노인복지관과 장애인 시설을 다니며 죽은 아내가 하던 봉사를 이어서 하고 있다.

“왜?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이런 엄청난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수백 번도 더 외쳤던 질문에 대해 그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무거운 물음을 계속 가슴속에 달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주변을 돌아보며 살겠다고 말한다.

* 이 페이지는 나라사랑 교육을 이끌어가는 국가보훈처가 함께합니다.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12월 13일)

장진호전투는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영하 30도에 이르는 혹한 속에서 벌어진 미국 전사(戰史)상 가장 처절한 전투로 꼽히고 있습니다. 미 해병1사단은 장진호 근처에서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중공군 제9병단 7개 사단 병력 12만 명에게 포위되었고, 당시 사단장이었던 스미스 소장은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해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장진호전투 결과 미군은 7500명, 중공군은 약 3만7500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UN군 참전–정전 60주년인 올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외에서 참전하신 많은 분들과 국가유공자분들께 감사하며 우리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진정한 나라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2013년 1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10

201910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0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