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人] 《6・25 바다의 전우들》 펴낸 최영섭씨

목숨 바쳐 우리 바다를 지킨 전우(戰友)들의 나라사랑을 후대까지 알리고 싶어요

글 : 이선주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대한민국 수립 이후 해군의 염원은 함포가 장착된 군함을 갖는 것이었지만, 빈약한 국가 재정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장병들이 월급에서 갹출하고 부인들이 삯바느질, 의복세탁, 수선, 뜨개질 등을 해서 1만5000달러를 모아 대통령에게 군함을 사달라고 요청했다.
1950년 4월 진해항에 입항한 백두산함은 2차 대전 참전 후 무장이 해제된 채 미국의 해양대 실습선으로 쓰이던 배였다. 시뻘건 녹을 벗겨내고 네이비색 페인트를 칠해 단장한 배는 6월 중순 진해를 떠나 부산・묵호・인천・군산・목포에 있는 해군경비부를 순회하고, 6월 24일 밤 11시 30분 진해로 돌아왔다. 대포 달린 멋진 군함의 위용을 장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백두산함 하사관과 장병은 새로 도입한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에 승조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장병 중 일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장병들은 오전 7시에 일어나 묵은 빨래를 하기로 했다.

오전 10시, 빨래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한 후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동해안에 인민군 군대가 침공해 상륙 중이다. 출동준비를 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아무 예측도, 준비도 없이 6・25 전쟁은 시작됐다. 백두산함이 전투의지를 다지며 진해항을 출항한 것은 6월 25일 오후 3시. 오후 8시가 넘어 울산 앞 방어진 동쪽 3마일 해상에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수평선에 흐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까맣게 칠한 선체에 국기도, 배 이름도 없었다.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갑판에 무장한 군인이 가득했고, 대포와 기관포도 보였다. 백두산함보다 두 배쯤 큰 배로, 군인이 1000명은 될 것 같았다.


밤 11시 20분. 최용남 함장은 전 장교를 집합시키고 “괴선박은 김일성 공산당 군함이 틀림없다. 저 배는 부산을 점령하려고 내려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 전투에 돌입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말했다. 이들은 8개의 물잔에 냉수를 따른 후 건배했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건배를 마친 최영섭 소위는 포갑(포술갑판) 분대를 집합시키고, “세탁한 옷으로 갈아입고 전투배치에 임하라”고 명령했다. 죽더라도 깨끗한 시체를 남기자는 뜻이었다. 포탄 첫 발이 포성을 울리며 적함으로 날아가자 최영섭 소위는 조마조마했던 가슴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백두산함은 그동안 모의탄으로만 훈련했지 실탄사격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갖고 있는 포탄은 100발. 30발가량 쏘았을 때 함장은 “전속력으로 적함에 접근 공격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포탄을 아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 발의 포탄이 적 함교를 폭파했고, 적함의 마스트(갑판에 세운 기둥)가 꺾여나갔다. 적함과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고, 적함의 기관실이 명중했다. 26일 오전 1시 10분경, 적함은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바닷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적의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 외판을 뚫었고, 조타사 김창학 3등병이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이어 다시 한 발이 주포 갑판에 떨어져 파편이 튀었는데, 장전수 전병익 2등병이 가슴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전투는 끝났고, 최영섭 소위가 두 사람을 찾았을 때는 사병식당에서 응급수술을 마친 후였다. 최 소위가 다가서자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 “적함은 어떻게 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격침했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라고 외치자 두 용사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이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끝까지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기력을 다해 “대한민국…”이라고 하더니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이 끝맺지 못한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대한민국 만세!’인지, ‘대한민국을 지켜주세요!’인지. 그 말이 계속 메아리쳐 들리는 듯합니다.”


일산 자택에서 만난 최영섭씨는 63년 전 그때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부하 70명의 이름을 지금도 한자(漢字)로 한자 한자 쓸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첫사랑이 있어요? 있다면 첫사랑의 이름을 잊을 수 있어요?”라고 되묻는다. 후에 ‘대한해협해전’으로 이름 붙은 이 전투로 우리는 부산항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때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부산항이 점령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6・25의 전세(戰勢)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부산항을 지킴으로써 북쪽과 남쪽에서 협공을 하려던 북한의 계획이 틀어졌고, 유엔군과 무기, 탄약, 장비 등 병참물자가 들어올 수 있었다. 부산항을 이용해 수송된 유엔군 16개국 병력은 연 590만 명. 군수물자는 5500만 톤에 이르고, 식량, 의약품, 피복 등 다량의 구호품이 들어왔다. 맥아더사령부 정보요원으로 활약했던 노만 존슨은 1991년 발표한 책 《한국작전》에서 “북한군 특수요원들을 태운 위장선을 한국 해군이 격침시킴으로써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계획을 막았는데, 이게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적었다.


1928년 강원도 평강에서 출생한 최영섭씨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47년 2월 38선을 넘어 월남,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사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왜 해군이 되기로 결심했을까?

“독립된 나라에서, 나라가 준 군복을 입고 나라가 준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있겠어요? 우리는 나라 잃은 설움도, 북한에서 소련군과 공산당의 행태도 다 겪어봤잖아요? 일제하에서 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우리말도 역사도 배울 수 없었어요. 일본 유학을 갔을 때는 하숙집들이 ‘조선학생들은 받지 않는다’고 써 붙여놓은 것을 보면서 더욱 나라 잃은 설움을 느꼈습니다. 겨우 나라가 해방되었는데, 이제는 소련이 제멋대로 하더라고. 소련이 조종하는 북조선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저희 가족들은 두 차례에 걸쳐 모두 월남했지요.”

6・25 전쟁 발발 4개월 전 임관한 그는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갑판사 겸 항해사, 포술사로 부임하자마자 6・25를 맞았다. 초임장교였던 그는 대한해협해전을 비롯, 서해안 봉쇄작전, 덕적도 영흥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대청소 소청도 탈환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그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의 제2대 함장이 됐는데, 1965년 일본선박으로 위장한 고속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을 생포하는 전공(戰功)도 세웠다. 1968년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 등을 지내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바다의 중요성을 교육하는 일에 투신해왔다.

“부대들을 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초-중-고등학교 교장들을 많이 만나요. 1년에 200~300명은 될걸. 그들이 교사를 교육하고, 교사들이 다시 아이들에게 바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잖아? 안보든 자원이든 바다를 생각하지 않고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지요.”

대한해협해전 전승 기념행사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추도하는 최영섭씨.
그는 최근 바다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단행본 《6・25 바다의 전우들》(세창미디어刊)을 펴냈다. 이 책을 펴낸 이유를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목숨을 던지며 나라를 지켜낸 전우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지 그 흔적과 이름 석 자를 후대에 남겨놓는 게 노병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6・25 그때 나의 선대 할아버지가 조국의 바다, 조국의 산야, 조국 하늘에서 이렇게 싸워 오늘의 조국을 지켜냈구나’ 하며 선대 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는 후대들의 모습을 가슴속으로 그려보았습니다. 6・25 전쟁을 잊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공산군의 침략으로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대한민국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지켜졌는지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우리 국군은 빈약한 무기를 들고 막강한 무력으로 기습 침공한 인민군에 맞섰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6・25 세대의 목숨과 피, 땀으로 지키고 일구어낸 희생이 깔려 있음을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 이 페이지는 나라사랑교육을 이끌어가는 국가보훈처가 함께합니다.

영천전투

영천전투는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국군 8사단이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위기에 처한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전투입니다. 영천전투의 결과, 적 15사단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적 사살 3799명, 포로 309명, 전차 5대 파괴, 장갑차 2대, 차량 85대, 소화기 2327정 등을 노획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신 국가유공자분들께 감사하며, 우리나라를 지켜나가는 것이 진정한 나라사랑임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 2013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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