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사과와인 ‘추사’ 만든 정제민

대한민국 우리술대축제에서 대상 받은 예산의 사과와인

봄이면 흰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붉은 열매가 열리는 사과나무. 사과는 다시 호박빛을 띤 와인으로 재탄생한다. 사과로 술을 빚으며 조금이나마 ‘예술가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한 양조자가 있다. 예산의 사과와인 ‘추사’로 출시 3년 만에 ‘대한민국우리술대축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정제민씨다. 봄을 기다리는 와이너리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사과와인인 시드르와 칼바도스, 프랑크푸르트의 아펠바인, 캐나다의 피너클 아이스 애플와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과와인이다. 와인 하면 ‘포도’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유럽 각지에서는 직접 농사지은 사과로 만든 ‘애플와인’도 인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명주(名酒)라고 할 만한 사과와인이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우리술대축제’ 우리술 품평회에서 과실주 부문 대상을 차지한 ‘추사애플와인(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주), 대표 서정학)’이다. 이 와인은 대전에서 열린 ‘와인&푸드 페스티벌’에서 전통주 소믈리에 국가대표 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0년 첫 출시된 ‘추사(秋史)’는 현재 인천공항 면세점에 입점해 있다. 명품 사과와인을 만든 주역은 캐나다에서 와인공부를 하고 돌아온 정제민(46)씨다.

‘추사’는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몽로에 위치한 ‘은성농원’에서 태어났다. 예산은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땅으로, 사과로도 유명한 곳이다.

“예산은 사과농사를 짓기 좋은 황토 땅에 서해가 가까이 있어 해풍 덕에 당도가 높아요. 일찌감치 밀식재배체계를 도입해 ‘일조량’을 최대한 높인 것도 예산사과 맛의 비결인 것 같아요.”

6만6000여㎡ (2만여 평) 규모의 은성농원은 장인어른의 정성어린 손길이 골고루 배어 있는 30년 전통의 땅이다. 정제민씨는 “좋은 와인은 좋은 재료에서 나오는데, 이 땅이 추사애플와인 맛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추사는 ‘가을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짓고 나서 ‘추사 김정희를 떠올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도 늘 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1948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가 경매가 6100만원에 낙찰되었다는 기사를 봤어요. 와인을 마치 ‘골동품’처럼 여기는 거죠. 샤토 무통 로칠드는 샤갈, 피카소, 달리 등 세계적인 화가들이 와인 라벨의 그림을 그려 더욱 유명하잖아요? 와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문화적 가치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우리술대축제’에서 사과와인이 대상을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호텔과 유명 레스토랑에서 활동하는 소믈리에를 중심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국내 최고의 술을 선정하는 품평회인데, 그동안은 복분자나 머루 등으로 만든 향이 강한 술이 대상을 받았다.

“사과로 만든 술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사과가 발효 숙성하는 과정은 다른 과일보다 까다롭습니다. 강하지 않은 향을 끄집어내야 하니까요.”


‘추사’는 예산의 황토사과인 후지사과를 100% 사용하는데, 물과 알코올을 첨가하지 않고 한 달 간 저온발효와 1년간의 숙성을 거친다. 캐나다의 아이스와인 제조방법과 같다. 그가 사과와인을 만들면서 벤치마킹한 곳은 캐나다 퀘벡지역의 피너클 아이스 애플와인이다.

“피너클 와인은 1월까지 사과를 수확하지 않고 눈을 맞도록 그대로 둡니다. 늦게 수확해 만든 아이스 애플와인은 당도가 높아 달콤한 맛을 냅니다. 캐나다의 추운 겨울날씨 덕분에 다른 나라, 다른 지방의 와인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거지요.”

그가 와인에 빠진 것은 캐나다 토론토로 가족이민을 가면서부터였다.

“캐나다에서는 우리가 가양주를 담가 먹었듯이 집에서 와인을 담가 먹는 문화가 발달해 있어요. 텃밭이나 집 앞에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를 수확한 후 자신들이 마실 양만큼 와인을 만드는 거지요.” 그러나 주거문화가 바뀌면서 집집마다 담그는 대신, 소규모로 술을 만드는 곳이 발달했다.

“마을마다 홈메이드 술공방이 있어요. 포도 등 과일재료를 가져오면 공방에서 술을 담가주는 겁니다.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요.”


독서광이었던 그는 토론토에 종로서적을 차렸다. 한국 책을 구하기 위해 뉴욕까지 10시간씩 운전해 다녀오다 아예 서점을 차린 것이다. 본업 이외의 시간에는 마을 술공방을 다니면서 와인제조를 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그리스인이 운영하는 공방이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그는 10년 전 귀국했고, 캐나다유학원을 운영하면서 다음카페에 와인동호회를 운영했다.

“본업보다 와인동호회에 더 빠져 있었죠. 제철 과일을 확보해 과실주를 담그려 과일농장을 찾아다니는 게 행복했어요. 그러다 장인어른의 농장인 ‘은성농원’에서 예산사과와인페스티벌을 열고, 동호회원들을 중심으로 음악과 요리가 함께 하는 축제를 벌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지역축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어요. 장인어른께 은성농원의 사과를 가지고 와인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아버님도 사과를 2차 가공하는 방법을 찾던 터라 허락해주셨지요.”

예산사과를 알리기 위해 랜드마크가 필요했던 예산군과 와이너리에 대한 꿈을 꾸던 ‘은성농원’이 함께 힘을 모아 와인제조장, 시음장, 견학과 체험을 할 수 있는 체험관이 만들어졌다. 유럽의 와인산지와 같은 형태다. 매년 가을 열리는 예산사과와인페스티벌은 주한 외국인들에게 특히 인기라, 올해에는 외국인만을 위한 작은 페스티벌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술은 세월이 빚는 것 같아요. 처음 와이너리를 시작할 때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음 세대에나 빛을 볼 수 있다는 각오로요.”


그는 소규모 와이너리를 운영하면서 유통망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만큼 가양주가 발달한 나라도 없습니다. 유교문화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직접 농사지은 쌀로 술을 빚어 차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냈으니까요. 집집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대물림되던 가양주 전통이 있었는데 어느새 양조는 세금을 걷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죠. 술이 맛과 멋을 음미하는 수단이 아니라 빨리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프리미엄 술이 설자리가 없는 게 지금 한국의 현실입니다.”

소박한 와이너리를 꿈꾸었던 그는 ‘양조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예술가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느낄 정도로 행복해요.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희망을 갖고 걸어가고 싶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사과와인은 대문호 괴테가 즐겨 마신 술이어서 더 유명하다. 지역의 전통주는 그 지역 문화와 결합할 때 더 낭만적인 이야기가 탄생한다. 앞으로 추사에 담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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