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人]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전사한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다시는 나 같은 어머니가 안 생겨야죠”

“평기야, 엄니 왔다.
그런데 너를 어디에서 찾아?
어디에서 찾느냐 말이야?”
평택 해군2함대 ‘서해수호관’ 2층 천안함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씨는 천안함 전사자들의 유품이 전시된 유리벽 앞에서 꾹꾹 눌러놓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벽 안에는 아들의 희디흰 제복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평기가 해군에 입대한 후 3개월 만에 진해로 면회를 갔는데, 흰 제복에 흰 모자를 쓴 채 면회장을 향해 척척 걸어오는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집에 가서도 ‘우리 아들 멋있다. 우리 아들 멋있다’고 되뇌었죠.”

대학에 다니다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한 아들은 13년 동안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과 수석으로 들어간 대학을 중도에 그만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어머니께 “군인생활 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어요. 석사, 박사학위까지 딸 수 있어요”라며 위로하던 아들이었다. 집에 오면 어깨도 주물러주고, 꼭 끌어안으며 “엄니, 엄니 아들 믿지요?”라고 말하던 다정한 아들. 윤청자씨는 그때마다 “그럼 믿지. 내가 아들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라고 말했다. 아들이 해상근무를 할 때면 바람만 불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될 때는 더욱 속이 탔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기에 고 민평기 상사도 배를 탄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

“천안함에 오르기 전날, ‘엄니, 내일 배 타요’라고 전화를 했더라고요. 배 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당장 쫓아가서 목덜미를 잡고 끌고 올까봐 전날 전화한 거지요.”

아들은 “6개월만 배를 탈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배를 타야 중사에서 상사로 승진도 할 수 있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자신은 행정을 보니 갑판 위로 나올 일도 없고 안전한 곳에 쏙 들어가 근무한다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어려서부터 입이 짧았던 아들이 제대로 챙겨나 먹는지 걱정하는 어머니께 “잘 먹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텔레비전에서 저녁 뉴스를 보는데, 군함이 두 동강 나서 바다로 가라앉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갑자기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잠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평기 있는 데가 서해야, 동해야?’라고 물었죠. 남편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평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하겠느냐, 잠이나 자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도 ‘사고 수습하느라 우리 평기가 고생하겠네’라는 생각에 계속 전화를 했는데, 신호음은 들리는데 받지를 않는 거예요. 텔레비전으로 생존자 구조 장면을 보면서 평기한테 전화하느라 그날 밤을 꼬박 샜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실종자 명단을 발표하는데, ‘민평기’가 있더라고요. 미친 듯이 맨발로 뛰쳐나가니 남편이 따라와서 꼭 끌어안으며 ‘우리나라에 군인이 얼마나 많은데, 민평기가 하나겠어? 정신 바짝 차리라’고 했어요.”


그다음은 한 순간 한 순간 가슴이 조여들고, 애가 타들어가는 시간들이었다. ‘저 속에 우리 아들이 있는데’라는 다급한 마음에 바다로 뛰어 들어가다 잡혀 나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달나라도 갔다 왔다 하는 세상에 바다 속 시신도 못 건진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천안함의 승조원 104명 중 40명은 시신으로 돌아왔고, 6명은 끝내 시신조차 못 찾았다. 윤청자씨는 “그 6명의 부모 마음은 어떨지, 그분들 앞에서는 죄인 같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엄마가 마음 모질게 먹지 않으면 못 보여드린다’고 가족들로부터 다짐을 받은 후에야 보게 된 아들의 시신.

“태극기로 몸을 덮고 얼굴만 내놓았는데, 푸르스름하기는 하지만 영락없는 내 새끼였습니다. 끌어안아보니 몸뚱아리가 얼마나 차디차던지. 따습게 해주려고 꼭 끌어안는데, 가족들이 나를 번쩍 들고 나갔어요. 잠시 후 기절했고요. 지금도 한이 되는 것이 그 찬 몸을 녹여서나 보냈어야 했는데…”

근무교대를 한 후 씻으러 들어갔던 아들은 화장실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피격 당시 충격으로 이리저리 몸이 부딪혀 양쪽 팔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아들을 다시 만들 수도 없고, 흙으로 구울 수도 없고, 사올 수도 없고. 아깝고 원통하고 애통한 것을 말로 다하지 못하지요. 먹지도 자지도 못하니까 손녀딸이 죽을 끓여 입에 넣어주는데, ‘아들을 그냥 보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났지요.”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바뀌었다. 이제껏 5남매 키우며 농사일 하느라 골몰해 부녀회에도 잘 나가지 않던 어머니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들의 소원이었던 승진을 사후(死後)에라도 시켜달라고 요구하고, 대통령 면담 때는 아이들에게 안보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천안함 피격사건을 교과서에 실어달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을 찾아가 ‘북한에 대해 퍼주기식 원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도 소리를 높였다.

평택 2함대 서해수호관
종전이 아니라 휴전 중인 우리나라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관. 제1 연평해전과 제2 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피격사건에서 연평도 포격도발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도발과 북방한계선(NLL)을 지키기 위한 해군의 노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평택 2함대에는 인양된 천안함 선체도 공개되어 있어 천안함 사건의 처참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치열한 전쟁 끝에 죽었으면 ‘내 아들 장하다’고나 했을 텐데 느닷없는 폭침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어이없고 답답하고 분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그는 ‘다시는 나 같은 어머니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며 유족 보상금 중 1억여원을 내놓았고, 해군은 이 돈으로 기관총 18대를 마련했다. ‘3·26 기관총‘(K-6)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기관총은 9척의 초계함에 2정씩 나누어 장착됐다. 그의 이야기는 최근 천안함 피격사건 3주기를 맞아 천안함재단이 제작한 동영상 〈어머니의 바다〉에도 소개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내가 일곱 살 때 6・25전쟁이 났으니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 일찍이 경험했습니다. 서천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은 집을 지켜야 한다며 남아 계시고 우리는 미숫가루에 삶은 달걀을 싸서 피난을 보내셨어요. 어머니는 맷돌로 곡식을 갈아 미숫가루를 만들면서 우시고, 허리에 돈을 차주면서 또 우시고. 막내인 나한테 ‘오빠 언니한테 꼭 붙어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지요. 동네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 죽이고 죽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고요.”

그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나라의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뿐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촌부(村婦)이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길 가다가도 군복 입은 군인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나서 덥석 끌어안는다는 그다.

천안함 피격사건 후 남편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몸을 함부로 한 끝에 암에 걸린 것. 방광암 말기였다. 의사가 수술 중 나와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하는데, 그는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큰딸이 열 살 때 냇물에 빠져 죽고 평기마저 그렇게 되었는데, 남편까지 보낼 수는 없었어요. 죽고나면 영영 못 보는 일이잖아요?”

수술 후 남편과 함께 부여 집으로 돌아간 그는 직접 농사지어 채식 위주로 상을 차리면서 암에 좋다는 것은 이것저것 다 시도했다. 남편의 상태는 기적적으로 호전됐고, 암세포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고 한다. 낮에는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지만, 밤마다 꿈속에서 아들을 찾아 밤바다를 헤맨다는 그. 농사일이 바빠서 부여로 급히 내려가야 한다는 그에게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시느냐”고 묻자 “내가 흐트러지면 우리 집이 안 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슬픔을 딛고 일어나 더 큰 품으로 세상을 끌어안는 ‘한국의 어머니’를 그에게서 엿본 것 같았다.

사진 : 하지영

용문산 전투 (5월 18~21일)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기간 동안 육군 6사단이 가평 용문산 일대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입니다. 압도적인 병력의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3일 밤낮으로 공격해왔으나, 장병들의 결사항전과 아군의 공중화력지원으로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중공군에 밀리던 국군과 연합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지금의 휴전선 부근까지 국토를 회복했고, 결국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군 측은 휴전회담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신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여 더욱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나라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국가보훈처 제공)
  •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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