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 릴레이 (17) 신우재 에세이스트, 전 청와대공보수석비서관

90일간의 런던 탐험

다음 버킷리스트는 최병효 전 노르웨이 대사가 이어갑니다.
내 버킷리스트를 공개하라는 청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여러 날 고심했다. 끙끙대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사정을 털어놓으니 “당신은 지난 15년 동안 하고 싶은 것은 거의 다 해봤을 텐데 아직도 남은 게 있어요?” 한다. 그러더니 한술 더 떠서 “새 여자를 하나 찾아 장가를 한 번 더 가보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놓고는 자기도 우스운지 껄껄 웃어 보인다.

하긴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55세의 좀 이른 나이에 사회 2선으로 물러났다. 더 정확한 말로 하면 물러난 것이 아니라 밀려났다. 공직에 있다가 정권교체를 만난 것이다. 그 후 15년 동안 7년간 대학 강단에 선 것 외에는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내 자신을 위해 썼다.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 꽃과 채소가 가득한 정원과 텃밭을 가꾸고 싶다, 잡문이나마 글도 써보고 싶다, 소설과 역사를 읽고 싶다, 여행도 좀 해야겠다, 야생화 사진을 찍고 싶다, 차분히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듣겠다, 등의 대단하지 않은 소망목록이지만 마음껏 시간을 재단하며 보냈다. 모두가 살기 어려운 세상에 이렇게 15년을 살았으니 뭔가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런데 또다시 소망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좀 염치가 없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 그렇다고 소망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뻔뻔스러울 수도 있지만 내 소망목록에서 한 가지만 공개하겠다.

세계의 도시 중에서 내 호기심을 가장 자극하는 도시는 런던이다. 역사책과 소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오랫동안 나는 이 도시와 무수히 만났다. 그러나 런던을 깊이 알 기회는 없었다. 방문할 때마다 늘 시간에 쫓겨 아쉬움을 안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런던은 찬란한 과거를 지닌 도시이면서 그에 못지않은 현재를 누리고 있다.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도시로 남을 것이다. 이 도시가 지닌 인문적, 사회과학적, 예술적 매력을 탐구하려면 짧은 여행일정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3개월쯤 장기 체류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싶다. 변덕스러운 런던 날씨를 감안하여 시작은 6월에 하고 8월 말에 끝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독한 장마와 더위를 피하는 효과도 있다. 90일쯤 지낼 요량으로 셋집을 하나 얻는다. 위치는 런던 중심부에서 좀 떨어진 곳, 욕심을 부려본다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식물원과 정원이 있는 큐 가든 부근이면 좋겠다. 그곳은 매일 찾아가도 볼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차림으로 카메라를 챙겨 넣고 마음 가는대로 발길을 옮기면서 이 도시를 탐험한다. 관광객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명소는 사양이다. 열린 마음, 열린 일정으로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헌책방과 골동품 시장, 세계 각국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무수한 맛집, 소설에 나오는 동네들을 두루 돌아보는 것이다. 되도록 공원과 정원, 그리고 유서 깊은 묘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산책하며 그들이 가꾼 정원을 훔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 느끼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두자는 것이다.

“런던은 수수께끼, 파리는 해설”이라는 말이 있다. 파리는 프랑스어의 명료성과 순수성을 지닌 도시다. 그러나 런던은 영국작가 스티븐 프라이의 말을 빌리면 “수치심 없는 창녀”처럼 전 세계 언어를 품에 안은 영어와 같은 도시다. 이런 수수께끼의 도시, 현대의 바빌론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90일도 짧을지 모른다.

그림 : 배진성
  • 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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