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人] 금탑산업훈장 받은 권숙광 경창정공 직장장

열네 살 때부터 44년간 한 직장 근무하며 수출입국(輸出立國)에 헌신

11월 30일은 무역의 날이다. 국가 산업화에 막 시동을 걸었던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한 것을 기념해 매년 11월 30일을 무역의 날로 정해 수출역군들의 노고를 기렸다. 정부에서는 무역의 날을 12월 5일로 바꾸고자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5일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면서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1조 클럽에 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국권침탈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는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1억 달러에서 1조 달러로, 자원도 기술도 없던 나라가 이렇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기적’ 뒤에는 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셨던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경창산업도 그 대표적인 예다. 창업자인 손기창 명예회장은 일찍이 부모를 모두 잃고 열다섯 살 때인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테인리스로 고급 시계밴드를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남다른 손재주와 성실함으로 공장장에까지 올랐던 그는 1945년 5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격동하는 시대상황에서 그는 철판상을 열고, 과자를 만들어 파는 등 갖가지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버리지 않은 꿈이 있었다. 일본에서 배운 금형 기술을 조국에서 살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1961년 기회가 왔다. 군사정변을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 소장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경제를 재건하는 데 본격적인 시동을 걸며 자전거 공장을 활성화하기로 결정하면서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보급되는 자전거는 일본이나 대만에서 생산한 자전거를 밀수를 통해 들여오는 것이 전부였다. 프레스 관련 기술에서만은 남다른 자신감이 있었던 그는 1961년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창공업사를 설립해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자동차 부품도 생산하면서 경창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현대자동차가 독자모델을 개발해 수출까지 하는 기적을 이룰 때 중요 부품을 공급하면서 그 기적의 한 축이 되었고, 끊임없는 기술혁신과 작업환경 개선으로 다른 업체에서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되었다. 1988년에는 일본에 자전거 브레이크 수출을 개시해 일본시장의 60%를 점유하면서 ‘5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고, 1994년에는 미국에 자동차 부품 수출을 시작하는 등 경창은 우리나라의 수출입국(輸出立國)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9년 입사, 44년째 한 직장에서 일하면서 이 모든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온 경창정공(주)의 직장장 권숙광씨가 지난 ‘근로자의 날’에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기능인, 근로자’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를 대구시 달서구 장동 경창정공 공장에서 만났다. 경창산업의 계열사인 경창정공에서 생산하는 자동차 부품은 현대차와 기아차 등 우리나라 자동차뿐 아니라 크라이슬러・푸조・닛산・BMW 등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회사에 납품, 매출액의 40%를 수출에서 올린다고 한다. 그가 경창에 입사한 것은 열네 살 때. 경주시 안강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대구에 왔다 기술을 배우고 싶어 공장에 들어왔다 한다. 경창에서 일하는 총직원이 14명이던 때였다.

“어릴 때부터 자전거를 동경했어요. 내 자전거가 없으니 옆집 자전거를 몰래 훔쳐 탔다 제자리에 갖다 놓곤 했지요.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곳이라 무엇보다 끌렸습니다. 이곳에 입사한 후 3개월치 월급을 모아 자전거를 샀고, 그걸 타고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 상쾌한 기분을 말로 다 하기는 어렵지요. 지금도 생생하니까요.”

공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정리정돈과 청소, 기름칠 등 온갖 잡일을 하던 그는 손기창 명예회장에게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게 하는 그를 보고 손 회장은 선뜻 허락했고, 그는 선배 밑에서 드릴작업부터 배웠다.

“구멍 뚫는 일이 간단해 보여도 막상 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드릴을 잡는 각도와 속도, 회전수가 딱딱 맞아떨어져야 하고, 힘을 너무 많이 줘도 안 줘도 안 되지요. 잘못해서 비싼 드릴을 부러뜨리기라도 하면 당장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드릴에서 밀링・선반・연마・조립 등 기술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재미가 있었고, 작업반장이 되어 일을 진두지휘하면서 품질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안을 내면서 회사가 원가절감과 생산력 향상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갖추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가 금탑산업훈장을 받을 수 있게 된 공적사항은 길다. 특허권 등록 19건, 실용신안 등록 7건, 의장등록 9건, 상표등록 9건에 참여했고, 공정이나 품질개선 제안은 61건에 이른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상하부 금형을 이용한 부품 연속가공용 이송장치 금형기술 발명으로, 우리나라 금형 기술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건축용 클램트 제조공정에 대한 제안은 일본에서 특허까지 받았다.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오토바이용 기어의 국산화 개발에 참여해 수십억원의 수입대체 효과도 거뒀다. 연간 40억~50억원의 캐스터(caster)를 미국시장에 수출하고, GM의 1차 협력업체인 미국 보그워너사에 연간 50억~60억원의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게 된 것도 이런 노력을 통해서다.

그의 공적사항에는 기술적인 내용만 있는 게 아니다. 40여 년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결근하지 않은 성실성, 직원들과 속을 터놓고 대화하면서 밝고 명랑한 직장 분위기를 만들고 노사화합에 앞장선 점도 인정받았다.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뒤늦게 대구기능대학 생산기계기술학과 기능장 과정에 들어가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는데, 현장과 학교에서 익힌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대구폴리텍대학에서 후배들에게 특강을 하고, 대구경북기술인모임인 ‘기술인동우회’를 결성해 정보교류를 통한 기술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창업주가 이제 아흔이신데, 제가 여전히 예전의 그 꼬마로 보이시나 봐요. 훈장을 받고 찾아뵈었더니 ‘상장 좀 보자’고 좋아하셨지요. ‘가문의 영광이다. 개인의 영광이자 집안, 회사의 영광’이라고 감격하셨지요. 정년이 지나도 계속 회사에 있어달라고 당부하시고요. 벽돌을 한장 한장 쌓듯 차근차근 회사를 발전시켜오신 그분 덕에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따로 방이 없어 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나무를 때가며 밤새 제품을 개발할 때는 창업주 부인이 새벽에 국을 끓여 오곤 했다고 한다. 일본 바이어를 붙잡아놓고 1주일 만에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씻지도 못하고 일하다 보니 발에서 썩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한 회사를 떠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높은 지위와 연봉에 집까지 사주겠다며 동종업계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머슴을 살아도 한 집에서 살아라. 한 우물을 파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대로 했지요. 제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아픈 기억은 있다. 1970년대 유류파동으로 공장직원을 대거 구조 조정해야 했던 때다. 직원들을 내보내고 자신도 나갈 생각이었지만, 공장재건을 위해 남았다.

“내보낸 직원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그때 나간 직원 대부분이 재취업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지요. 그때 ‘새로 태어난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요.”

IMF 외환위기 때 또다시 위기를 맞았지만, 그가 솔선해서 자신의 월급을 깎으면서 구조조정은 피할 수 있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20년. 이젠 눈빛만 봐도 전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부부싸움을 했는지 훤히 알 정도가 되었다. 직원들의 마음을 읽는 데는 아내 도움도 크다. 아내는 복지상담사 자격증을 갖추고 1주일에 2~3일씩 상담봉사를 하고 있는데다 동양철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아내를 보면 나도 긴장하게 되지요.”

“출장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처럼 좋은 곳은 없었다”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아내 꿈이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을 세우는 거라고 해요. 저는 은퇴 후에도 기술고문으로 공장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주고 싶고요.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재산은 대부분 사회 환원할 계획입니다.”

사진 : 김선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 무역의 날 11월 30일)

국권침탈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는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분류되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단결된 마음과 끈기, 노력의 결과로 60여 년이 지난 지금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 ‘세계 7번째로 20-50 클럽에 진입’, ‘싸이 열풍’, ‘G20 정상회담’과 ‘핵안보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올해 런던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의 성적을 거두는 등 분야별로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쳐 싸우신 국가유공자들에게 감사드리고,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더 크고 튼튼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보훈처 제공)

20-50클럽 : 5000만 명 이상의 인구 규모를 가진 국가이면서 선진국 진입의 기준이 되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국가를 지칭하는 말
  •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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