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악기장’ 김현곤씨

고악기를 복원하는 것은 그 시대의 정신을 복원하는 일

세종대왕이 ‘악기조성청’을 마련해 악기를 제작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얼마나 될까. 우리만의 악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세종시대의 악기를 되살려내는 이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 최초로 편경과 편종을 복원해낸 김현곤씨가 그 주인공이다. 경기도 파주의 악기공방(연악사)에서 그를 만났다.
국내 유일의 편경・편종 장인 김현곤(76・연악사 대표)씨는 우리나라 음악사에 큰 역할을 했다. 서양악기 제작에 헌신해오다 일제시대 이후로 끊긴 우리나라 고악기를 복원해 그 시대의 음악정신을 되살려놓은 것이다. 한평생을 악기제작과 고악기 복원에 몰두해온 그는 올해 중요무형문화재(제42호) ‘악기장(편종・편경)’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국립국악원과 함께 월금・비파 그리고 세종 때 ‘회례연(會禮宴)’에 쓰였던 여덟 종류 타악기인 요·탁(鐸)·응·탁·아·순·상·독 등을 포함해 15종의 고악기를 복원했고, 2010년에는 베트남 편종·편경을 복원 제작해 기증하기도 했다. 그가 만든 악기는 각 시도 국악원과 음악대학 국악과에 소장되어 있거나 사용되고 있다.

그가 고악기 복원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83년, 당시 국립국악원장이던 서울대 음대 한만영 교수 의뢰로 편종・편경 복원작업을 하면서였다. 편종・편경(編鐘・編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악에서 쓰이는 악기다. 아악의 기본이 되는 편경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다. 편경은 나무틀인 가자(架子)에 ‘ㄱ’자 모양 경돌 16매를 음률의 순서에 따라 틀의 위아래 2단으로 나누어 홍승(紅繩)으로 묶어놓고 각퇴(암소뿔)로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두껍고 얇은 것으로 음의 높낮이를 정한다. 편종은 경돌 대신 16매의 타원 모양 종을 가자에 걸어놓고 각퇴로 연주한다. 편경과 편종의 장식문양은 다양한 상징을 드러낸다.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 상서로운 새인 봉황은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오리는 사람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전달자다. 위엄 있는 사자는 권위를 드러낸다.

그는 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의 고증에 따라 세종조 편종을 제작했다. 그의 편경 제작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세종실록》과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모양 자체를 동일하게 복원한 것뿐 아니라 당시 편경의 재료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세종 때는 ‘악기조성청’이 있었어요. 중국 악기를 그대로 쓰지 않고 조선식으로 개량해서 썼거나 독자적으로 개발한 악기도 있었어요. 또 ‘율관’이라는 관직을 두어 음악을 장려했다고 해요. 모두 수공작업으로 이루어지고 120명이 4~5개월 걸려 악기를 제작했다고 하니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남양에서 경석을 발견한 이후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재료와 방법 등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편경 제작에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가자(틀) 제작과 조각은 박찬수 목조각장(중요무형문화재), 단청은 홍창원 단청장(중요무형문화재), 유소(악기에 다는 술)는 노미자 매듭장(서울시 무형문화재) 전수조교가 제작했고, 남양옥은 한국궁중옥연구원의 서지민 원장이 제공했다. 재료로 꼭 써야 하는 돌을 찾기 위해 전국의 광산을 2년 반 동안 뒤진 일, 율관부터 다시 만든 일, 쇳가루가 눈처럼 쌓인 공방 바닥, 잡티 없는 비취색을 내기 위해 갈고 또 갈았던 일 등 편경・편종을 복원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 찾기’였단다.

“《악학궤범》에 따른 그림과 치수를 참고하여 세종조 편종을 제작했어요. 문제는 편경이었죠. 문헌에는 ‘경기도 남양의 돌을 써야 한다’고 돼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1988년부터 중국에 수없이 드나들다가 찾아냈어요.”

악기제작을 했다는 옌볜 출신 조선족 통역사와 함께 상하이(上海)・톈진(延邊)・쑤저우(蘇州) 등지를 돌았지만 돌을 찾지 못하다가 1990년에 중국 허난성(河南省)에서 정저우(鄭州)로 내려가는 길의 한 광산에서 돌을 찾았다. 돌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깎아내야 한다. 물을 써서도, 장갑을 껴서도 안 되는 일이라 손을 다치는 일은 다반사다. 수작업이다 보니 1년에 한두 개밖에 못 만든다고 한다.

“수백 년 전 소리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일은 정말 보람 있어요. 음색을 찾아내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요. 제 머릿속에는 악기가 있는 것 같아요. 길을 걸으면서도 악기 생각을 하다 전봇대에 부딪치기 일쑤입니다.”


구상하고 있는 악기의 모양과 소리를 메모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그는 악기 개량에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아는 사람 없이 공부(선린상고)도 하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러다 악기상을 운영하는 집에서 하숙을 한 것이 악기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충무로의 악기상에서 서양악기 제작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음악을 좋아했지만 학교에 있던 풍금을 조금 쳐본 것 외에 경험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리를 찾아내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 보는 악기가 많아 독학으로 여러 악기를 섭렵했지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피아노・클라리넷・오보에・바이올린・색소폰・아코디언・기타 등을 수리해서 팔았죠. 악기사는 그때 이봉조씨, 엄앵란씨 부친 등 당시 음악인들의 아지트였어요.”


신의주 출신 피난민 중에는 음악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 모임이 그가 일하던 충무로 악기상을 중심으로 모이기도 했으니 그에게는 엄청난 음악적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서양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음악감상실에서 클래식・탱고・샹송 등 다양한 음악을 듣고, 단성사・수도극장・국도극장 등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한만영 교수도 이때 만났습니다.”

가난했지만 순수한 사랑과 음악을 향한 동경으로 가득 찼던 청년시절이 그리워 그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의 꿈은 평생 모은 전 세계 악기를 보여줄 전시관과 교육관을 여는 것이다. 그의 공방에는 그동안 수집한 세계 각국의 악기, 악기와 음악에 관련된 책들로 가득 차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그의 가슴속엔 여전히 악기수리를 시작했던 그 순수한 청년이 살고 있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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