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 릴레이 ⑫ 우순옥 이화여대 서양화 전공 교수

내년 안식년엔 느리고 자유로운 여행을…

다음 버킷리스트는 이성낙(가천의대 명예총장)이 이어갑니다.
이 글을 청탁받고 망설였다. 과정을 중시하며 평상심을 늘 마음에 담고 사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새삼 ‘버킷리스트’라 하니 우리의 삶의 향연이 자칫 어떤 목적을 향한 이벤트같이 수선스러움으로 느껴질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결국 하나만의 선택이고, 그 선택은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지만, 때론 어느 날 느릿하게 멈춰 서서 보면 내가 가지 않은 길, 다른 삶에 대한 동경과 회한이 슬며시 찾아오기도 한다. 누구는 40세부터는 매해 새로운 유서를 써서 책상 서랍에 곱게 넣어둔다 하고, 또 누구는 50세가 넘어서는 물론 먼 훗날이겠지만 누울 자리(무덤)를 미리 생각해두고 있다고도 한다. 난 어느덧 사십이 한참 넘었고 오십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으니 덧없고 유한한 인생길에서 이 우연한 기회를 핑계 삼아 과연 나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봐도 좋을 듯싶다.

지난 늦가을 개인전을 하면서 ‘우리는 모두 여행자’란 하얀 빛으로 쓴 텍스트 작업을 선보였다. 그보다 앞서 성북동 어느 길가 어떤 오래된 건물의 창에도, 또 구서울역 대합실에도 같은 글귀의 텍스트를 쓴 적 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창백한 푸른 점》에는 마치 하나의 푼크툼(punctum) 같은 사진이 한 장 실려 있다.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부근에서 촬영한 그 사진 속 지구는 아주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바로 그 창백한 푸른 점-태양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 티끌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깊은 감동과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우리는 모두 여행자’란 텍스트는 그렇게 먼 우주적 차원에서 본 우리의 한순간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며, 하나의 예술적 풍경 혹은 언어로 된 거울이다. 만약 나의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여행’이란 단어는 언제 어디서나 말만 들어도 은근히 설렌다. 그동안 소박하게나마 많은 여행을 즐겨왔지만 실로 마음속으로 가보고 싶은 머나먼 어느 곳은 아직 가보지 못한 것 같다. 광활한 대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 나를 겸허하게 하고 침묵하게 하는 그런 곳,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곳, 어떤 불변하는 영원과 맞닿을 수 있는 곳, 삶의 생명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곳, 또한 한없이 아득하고 고독한 곳, 그래서 나 홀로 더욱 충만한 곳,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마침 내년에 1년간 안식년을 맞이한다. 그동안 바빴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에 감사하고, 기대된다. 그때가 돌아오면 가장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또 한 번의 느리고 자유로운 여행을 유유히 떠날 예정이다. 그것은 아마 나의 버킷리스트의 시작이자 원천이 될 것이다.

그림 : 배진성
  • 2012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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