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식물 종자 채집에 평생 바친 강병화 교수

야생식물은 유용한 미래 자원

지난 2월 정년퇴임과 함께 강단에서 물러난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강병화 교수는 평생을 풀과 함께 살았다.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그저 풀만 들여다보느라 정년이 된 줄도 몰랐다”는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가 28년간 우리 땅 곳곳을 누비며 모은 1700여 종 7000여 점의 씨앗은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우리나라 식물자원 연구에 귀하게 쓰일 보물들이다.
퇴임은 했지만 강병화 교수는 여전히 고려대 이공계 캠퍼스 교수연구실로 출근한다. 강의를 하지 않게 된 만큼 연구에 더욱 매진할 것을 잘 아는 고려대 김병철 총장이 총장 임기 동안 자신의 연구실을 쓰도록 배려해준 덕분이다. 연구실에서 만난 강 교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오늘 모처럼 양복을 입고 왔는데,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동안 인터뷰를 여러 번 했는데 항상 등산복에 운동화 차림으로만 나오니까 주변에서 타박을 합디다. 학생들과 첫 대면을 하는 새 학기 첫 수업할 때와 주례 설 때를 제외하고는 양복을 입을 일이 거의 없어요. 1년에 절반 정도는 산과 들에서 지내니까요.”

고려대 농대를 졸업한 강 교수는 대학 졸업 후 농촌진흥청에서 3년간 근무하다 197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잡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고려대 교수로 부임한 것이 1984년. 제초제를 개발해 농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품고 돌아왔지만 연구 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실험실도, 변변한 장비도, 연구비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독일에서 배운 식물다양성, 식물의 자원화, 유전자원의 보존 등으로 연구의 방향을 바꾸었다.

관심을 가지니 길가에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새롭게 보였다. 다른 종류의 식물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고, 무게를 달고, 길이를 재서 꼼꼼히 기록했다. 독일 유학 시절 지도교수가 종종 쓰던 “식물에게는 일요일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주말에도 쉬지 않았다. 식물을 관찰하기 좋은 3월부터 11월까지, 해마다 자동차로 3만~4만km를 달렸다.

“씨앗 하나를 얻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일단 해당 식물의 정확한 서식지와 종자 성숙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 1년 전에 답사를 갑니다. 이듬해 시기를 맞추어 현장을 재방문하는데, 정확한 성숙기를 알아야 하고 날씨도 잘 맞아야 해요. 비가 내리면 종자가 유실되기 쉬워 1년간의 작업이 허사가 되기도 하거든요. 한번은 문경의 산에서 약용과 염료용으로 쓰이는 ‘지치’를 난생처음 야생 상태에서 발견했어요. 이식하면 채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아 두어 달 뒤 다시 찾아갔는데 야생동물이 다 뜯어먹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다 먹다 남은 가지에서 겨우 9개의 종자를 받아 왔지요.”

그렇게 전국의 산하를 누비는 동안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뱀에 물리고 벌에 쏘이는 건 흔한 일이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진달래 그루터기에 걸려 살아난 적도 있었다. 2004년에는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만둘 수가 없어요. 환경오염,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들로 식물 생태계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거든요. 전에 없던 새로운 식물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것들이 수도권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의 종자를 연구하고 보존해야 할 중요한 이유지요. 식물은 모두 미래 자원이에요. 문헌을 조사해보니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 약 2190종이 약용이고, 그중 1527종은 먹을거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식물 고유의 성분 연구를 통해 신약, 건강식품, 화장품 등 그 활용 범위를 얼마든지 넓힐 수 있지요. 이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체계적으로 식물자원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는 “현재 가장 시급한 사안은 가시박, 환삼덩굴, 칡 같은 덩굴식물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번식 속도가 매우 빨라 이대로 두면 10~20년 후 제주도 올레길은 칡덩굴길로, 둘레길은 환삼덩굴길로, 4대 강변의 자전거길은 가시박길로 바뀔 것”이라고 단언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도감 《한국생약자원생태도감》 발간

그는 우리 국민도 우리 땅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2008년 그동안의 연구를 집대성해 《한국생약자원생태도감》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세 권, 한 질로 구성된 이 책은 무게만 무려 15.5kg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2000여 종의 식물을 어린 싹부터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기까지, 생육 시기별로 나누어 각각 사진과 설명을 달았다. 수록된 사진만 무려 1만6000여 장에 이르는 국내 최대 식물도감으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쉽게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학자로서의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인데,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어서 제가 경비를 댔어요. 집을 담보로 2억5000만원을 대출받았지요. 한 질에 80만원인데 비싸다고 도서관에서도 잘 사주질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웃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책이고, 몇 십 년 내에 나올 수 있는 책도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믿어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야생종자를 보유하고 있는 고려대 ‘야생자원식물종자은행’도 그가 만들었다. 학교를 떠나며 그는 그동안 모은 종자들을 모두 학교에 기증했다. 종자은행에는 씨앗을 보관하는 10여 대의 냉장고가 있다. 수분이 남지 않도록 바짝 말려 방부 처리해 영하 20도에서 보관하면 수백 년이 지나도 싹을 틔운다고 한다.

봄을 맞아 강병화 교수는 또다시 밖으로 나간다. 늘 그렇듯, 아내 황경순씨가 그의 곁을 지킨다. 아내는 그가 채종을 위해 야외로 다닌 3880일 중 3000일을 함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연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공을 아내에게 돌린다. 강 교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한고향(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아주 오랜 인연이다.

정년퇴임에 대한 소회를 묻자 그는 “마음껏 채종하고 연구하고 집필할 수 있으니 꼭 서운하게 생각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며 웃었다. “앞으로 《한국생약자원생태도감》을 뛰어넘는 대작을 내놓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오히려 할 일이 더 많아진 이 열정적인 노학자에게 나이란, 그저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 : 김선아
사진제공 : 강병화
  • 201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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