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人] 4·19 혁명과 소녀의 일기 발간한 이재영 여사

“잊혀가는 4・19 혁명을 젊은이들에게 알리려 책 냈어요”

1960년 4월 19일. 학생·시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맨몸으로 항거해 마침내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당시 여고 2학년생이었던 이재영 여사도 그 현장에 있었다. 교복 차림으로 선두에 서서 구호를 선창하고 대열을 이끌었던 이 용감한 소녀는 어느새 70대가 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러 4·19 혁명도 잊혀가고 있다. 그것이 안타까웠던 그는 4·19의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4·19 혁명과 소녀의 일기》라는 책을 펴냈다.
올해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52년이 되는 해다.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항거였지만 반세기가 지나면서 주역들은 이미 70대가 되었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선 용어가 되었다. 지난해 4·19를 앞두고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단 12%만이 4·19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재영 여사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책을 쓰겠다는 용기를 낸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와 민주주의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많은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그는 펜을 들었다. 마침 그 시절의 일상을 꼬박꼬박 기록해두었던 일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인 기록과 당시의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들을 조합해 시간순으로 4·19 혁명을 정리했어요. 4·19 혁명은 크게 세 가지 사건이 단초가 되었어요. 2월 28일에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가 있었는데, 자유당 정부는 시민들이 거기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을 등교시켰고 공단 사람들에게도 출근을 지시했어요. 참다못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죠. 그 뒤 3월 15일에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드러나면서 시민들이 격한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며칠 뒤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진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죠. 전국에서 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어요. 그런데 시위를 마치고 조용히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난데없이 정치깡패들이 달려들어 무차별 폭행을 가했어요. 이날 많은 학생들이 다쳤고, 이 일이 라디오·신문을 통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요. 결국 바로 다음날 대규모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죠.”

당시 명성여고(현 동국대사대부고) 2학년이었던 그는 교복 차림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웅변대회에서 수상할 만큼 목청 좋고 말솜씨도 좋았던 그는 용감하게 대열의 선두에서 구호를 선창했다. 총탄과 최루탄이 난무했지만 그는 겁먹지 않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딸이 걱정되었던 아버지는 시위 중 사망한 사람들을 안치해놓은 병원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일일이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고 한다.

1960년 4·19혁명은 자유당의 독재와 3월 15일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일어난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 거리를 행진하던 학생과 시민들의 외침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성장의 토대가 되었으며, 4·19혁명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오늘의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셨던 분들의 희생과 공헌을 잊지 말아야 하며,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진정한 보훈이라 할 것입니다.
(국가보훈처 제공)
“열여덟 살 소녀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묻자 그는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어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학생이면서도 투철한 국가관, 정의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었어요. 평소 신문을 많이 읽게 하셔서 또래 친구들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알고 있었고, 아버지와 신문 내용을 가지고 토론도 많이 했지요. 아버지께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도 필요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불의를 보면 못 참아요.(웃음)”


애국심 희박하고, 국익 생각하지 않는 세태 걱정스러워

요즘 그는 탈북자 북송 반대 시위 현장을 자주 찾는다. 탈북여성 1호 박사인 경인여대 이애란 교수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그는 “이애란씨도 단식시위를 하고 있더라”며, “광우병 사태 때 촛불 들고 나왔던 사람들, 천성산 도룡뇽 지키자고 시위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열변을 토하는데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이 도룡뇽보다 못한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부끄럽더라고요. 사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우리 세대가 그렇게 피땀 흘려 지켜낸 민주주의를 한쪽에서는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요. 작년에 4·19 혁명과 관련한 어느 세미나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주제 발표를 하던 한 교수가 ‘4·19 혁명은 촛불시위를 한 학생들보다 조금 더 격이 높았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촛불시위와 4·19 혁명을 비교하는 그 인식에 얼마나 화가 나던지. 애국심은 희박해졌고, 무엇이 나라에 이익이 되는지도 생각하지 않는 세태가 참 걱정스럽습니다.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에요.”

전형적인 여장부 스타일이지만 이 여사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해 한동안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다. 아들 넷을 키우며 정신없이 살던 중, 1980년 전두환 정부가 단행한 대대적인 공무원 해고사태에 휘말려 남편이 직장을 잃었다. 설상가상, 당뇨 합병증까지 얻은 남편은 이때부터 13년간의 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하루아침에 환자인 남편과 네 아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 그는 한복 바느질을 시작했다. 취미 삼아 배워둔 것이었지만 손끝이 야무져 금방 입소문이 났고, 주문이 밀려들면서 한때 제법 큰 매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더 이상 한복을 만들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음성 꽃동네 봉사도 30년 이상 이어오고 있고, 4·19혁명유공자회 이사로도 이름을 올렸다. 두 곳의 안보포럼 회원으로 활동 중이라 종종 세미나에 참석하고, 강연도 한다. 새벽 3~4시면 일어나 기도와 성경 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며 알찬 하루를 보내는 이재영 여사. 71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 넘치는 비결을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진 : 하지영
  • 2012년 04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