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리나리아 15238’ 백상준 셰프

라면에서 시작된 훈남 셰프의 요리 인생

모던 프렌치 레스토랑을 표방하는 ‘컬리나리아 15238’의 백상준 셰프. 세간에는 최연소 오너 셰프로도 유명하다. 길지 않은 경력에도 다수의 언론 매체에 소개되고 KBS 음식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한 웹진에서 ‘한국의 훈남 셰프 4인방’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이토록 빠른 성공가도를 달려가는 백상준 셰프에게 요리 인생은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훈남 최연소 오너 셰프의 이야기를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사건의 발단은 라면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라면을 고르고, 나만의 스타일로 끓여내는 것을 즐겼다. 라면의 세계는 오묘하다. 냄비의 종류, 물의 양, 재료를 넣는 순서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 라면은 실험장이었다. 섞어도 보고, 물을 빼기도 하고, 다른 재료를 넣기도 하며 오만 가지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러나 라면의 정점은 조리법 그대로 끓여 먹는 것임을 깨달았다. 가장 상업적이고 공업적인 음식인 라면.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요리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딱히 요리에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 구체적인 꿈은 없었다. 대통령? 변호사? 의사? 어찌 됐건 성공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영어는 시험에서 한두 문제 이상 틀린 기억이 거의 없다. 수학은 좀 못했지만, 그래도 명문대 경영학과에 갈 수준은 됐다. 때론 농담처럼 나중에 “라면집을 경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비웃었고 나도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런데 정말 나는 라면집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리브 채널 <이미숙의 배드신> 출연 모습.
대입 수능 날, 시험 문제가 술술 풀려갔다.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고 나는 들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외국어 영역에서 막혔다. 당황했다. 답안지를 네 번이나 바꾸면서도 정신을 못 차렸다. 수능을 망쳤다. 점수가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명문대를 꿈꾸었기에 도피하고 싶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학교 공부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국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딱히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도망치듯 어학연수를 떠났다.

뉴욕에서 랭귀지 스쿨에 다닐 때였다. 랭귀지 스쿨만 마치고 귀국할까, 아니면 학교를 알아볼까 하던 차에 우연히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라는 학교의 브로슈어를 발견했다. 뉴욕의 명문 요리학교인 CIA를 안 순간부터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 요리학교에 꼭 가고 말리라. 입학 기준에서 중요한 것은 토플 점수였다. 그날 이후 3주 동안 영어단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3주 만에 기준 토플 점수를 만들 수 있었다.

어쩌면 명문대생들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자부심이라는 것을 갖고 싶었다. CIA는 내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학교였다. 그래서 그렇게도 미친 듯이 매달렸던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학교에 가서 요리사가 되겠노라. 라면집 사장이 꿈이었던 나는 조금 더 큰 꿈을 갖게 되었다.

CIA에서의 생활은 전쟁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험난한 주방에서 교육과 실습을 하고, 쉴 틈 없이 공부해야 했다. 라면과 떡볶이를 만들면서 요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요리학교 생활은 처음 겪는 전쟁터였다. 요리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자부심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왕 어려운 것, 최고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 밖 식당에서 근무해야 하는 익스턴십 (Externship) 과정을 이수할 때였다. 처음엔 뉴욕의 유명 프렌치 레스토랑인 불레이(Bouley)에서 일하고 싶어 찾아갔다. 온갖 잡일과 허드렛일을 하면서 1주일을 보냈다. 마침내 익스턴십 계약 자격이 주어졌다. 불레이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직전, 학교 동료가 일하는 뉴욕의 유명 일식당 노부(Nobu)에서 경험 삼아 일해볼 기회가 있었다. 노부는 불레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단 하루 주방에 들어온 나에게 바로 고기를 굽는 ‘그릴 스테이션’ 일을 맡겼다. 신기하게도 처음 간 주방에서 일이 손에 척척 맞았다. 그날 뒤풀이에서 주방장은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했고, 고작 인턴이던 나는 단 하루 만에 노부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노부에서의 생활은 다시 요리가 즐겁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나날이었다. 힘든 학교생활로 요리에 지친 나에게 한 줄기 활력소였다. 요리사로서의 기회도 많이 주어졌다. 그릴 스테이션은 내가 도맡아 했으니. 비록 프랑스 요리를 하고 싶었으나 일식을 배우는 일도 그저 즐거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노부에서 반년 정도 더 일했다.

노부를 나와서 간 곳은 그레머시 타번(Gremacy Tavern)이라는 식당이었다. 미국 레스토랑 서베이에서 수년간 뉴욕 최고로 뽑힌 그곳에서 타번(Tavern)이라는 오븐을 담당했다. 노부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면, 이곳은 지옥에 가까웠다. 타번 담당 두 명이 하루 200명분을 담당했다. 1년 가까이 극도로 힘겨운 생활을 했다. 그 이후 뉴욕의 유명한 식당은 대부분 거치며 일을 했다. 그러다 군대 문제로 귀국했다.


한국에 와서는 무조건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가 되고 싶었다. 그레머시 타번에서 힘들게 생활하면서 내 자신의 음식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발전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시키는 음식이 아닌 자립해서 공부하고 만들어가는 요리를 원했다. 그래서 당돌하게 백상준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열었다. 컬리나리아 15238. 내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컬리나리아 15238의 콘셉트는 ‘믹스앤매치’다. 나는 퓨전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히 스파게티에 김치를 넣는다고 퓨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기본 원리에서 여러 요소를 고민하여 새로이 변형하는, 진정한 퓨전을 구현하고 싶었다. 셰프 백상준의 음식은 모던 프렌치 요리다. 아주 기본이 되는 프랑스식 요리법에 나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어린 시절 라면을 끓이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컬리나리아의 음식이나 집에서 먹던 라면이나 내 음식 철학은 그대로였다. 최연소 오너 셰프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운 좋게도 단숨에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다. 시작 단계의 요리사지만 컬리나리아의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쁘기도 하지만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음식은 재료가 제일 중요하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수개월 동안 진행했던 <우리 땅, 우리 음식>이라는 프로그램은 나를 더 좋은 요리사로 만들어주는 고마운 경험이었다. 한국 최고의 재료가 무엇이고, 가장 신선한 재료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된 최고 재료들은 지금 컬리나리아 음식의 중요한 밑천이다.

바람이 있다면 돌아가신 할머니처럼 사는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당신의 고추장을 3년치 만들어놓으셨다. 끝까지 나를 위해 고추장을 담그셨던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은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철학이다. 할머니가 보여주신 것처럼, 나도 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 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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