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 펴낸 정덕영씨

찌아찌아족에게 한글 전파한 선생님

한국에서 약 5400km 떨어진 인도네시아의 한 섬. 열대우림의 학교에서 한 학생이 칠판에 글씨를 적는다. “따리마카시.” 삐뚤빼뚤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따라 읽을 수 있는 이 단어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의 말로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다. 2010년부터 찌아찌아족 마을에는 한국인 교사가 들어와 사라져가는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문자 수출이라는 흔치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이 교사는 정덕영씨. 그는 찌아찌아족 사람들과 아주 특별한 1년을 보냈다.
찌아찌아족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부톤섬 남부에 살고 있는 인구 8만 명의 부족이다. 부톤섬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찌아찌아족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지만 이를 표기할 문자가 없다. 소리만 있는 찌아찌아어를 보존하기 위해 적절한 표기문자로 로마자, 아랍문자 등을 적용해봤지만 찌아찌아어를 온전히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훈민정음학회는 격음과 경음을 자유자재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문자로 쓸 것을 제안했고, 찌아찌아족의 관할지역인 바우바우시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훈민정음학회는 지원자 선발을 통해 정덕영씨를 바우바우시에 파견한 것이다.

후텁지근하고 뜨거운 정글 속 마을. 정덕영씨는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었다고 한다. 찌아찌아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초 인도네시아어만 익히고 갔기 때문에 의지할 것은 서울대와 찌아찌아족 출신 영어교사 아비딘씨가 함께 만든 찌아찌아어 초급 교본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정덕영씨와 찌아찌아족 학생들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낯선 언어와 새로운 문자를 넘어 그들이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은 찌아찌아족 학생들이 한글과 한국어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덕영씨는 찌아찌아족 고등학교에서의 첫날을 기억한다.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겠다고 소개했어요. 그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옆에 교장선생님이 있어서 내색은 못했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1개 초등학교와 3개 고등학교의 수업을 맡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을 가르칠 순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한국어 수업을 듣지 못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정덕영씨를 붙잡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한두 명씩 가르치던 것이 자연스럽게 방과후 수업으로 발전했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나무그늘 아래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는 시간은 그저 즐거웠다. 학생들도 습자지처럼 빨아들여 기초 한글 자모음을 가르친 지 불과 몇 주 만에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찌아찌아 마을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지만, 소박한 즐거움과 보람찬 나날이었다. 긴 이름을 외우지 못해 고생했던 기억, 간단한 도시락을 싸들고 아이들과 소풍가던 기억이 소중하게 남았다. 찌아찌아족 아이들은 하루 두 끼밖에 못 먹고, 신발 없이 맨발로 다닐 만큼 경제적으로 열악하다. 그런 아이들이 어렵게 구한 색종이에 한글로 자신의 이름과 인사말을 써서 정덕영씨에게 선물했다. 그는 아직도 그 편지들을 수첩 한구석에 항상 꽂고 다닌다. 찌아찌아 말을 한글로 써 읽을 순 있어도 이해하지는 못하는 그 편지에서는 아이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정덕영씨는 찌아찌아족 한글교사로도 유명하지만, 그전에 TV 프로그램 〈우리말 겨루기〉의 우승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 어려운 경쟁에서 우승할 만큼 평소에도 우리말에 관심이 각별한 정덕영씨의 원래 직업은 교사가 아닌 제약회사 직원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가 우리말에 정통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정덕영씨는 어린 시절 읽었던 전집의 순서까지 외울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아버지가 사다 주신 을유문화사의 한국아동문학독본과 계몽사 전집을 시작으로 그는 문학에 심취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동창이었던 고 기형도 시인과 교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문학 공모전 중 가장 큰 규모인 희중문학상에 시를 출품해 동상을 타기도 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이제는 잘 쓰지 않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내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절 남자들은 으레 상경계로 진학하곤 했다. 그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무역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제약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그의 한글사랑은 계속됐다. 마케팅 부서에서 제품교육을 하면서도 올바른 표현에 집착했고, 항상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사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좀 강했어요. 동료 직원들도 피곤해할 정도로 잘못된 말을 콕콕 집어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바른 말을 찾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는걸요.”

그런 그에게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계기가 있었다. 20년 가까이 근무한 회사에서 명예퇴직한 후 가족들과 함께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담벼락에 “이곳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니 크락숀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정덕영씨는 두 군데나 잘못된 이 문장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마침 학교에서 나오는 교사를 붙잡고 ‘크락숀’은 ‘클랙슨’ 혹은 ‘경적’으로, ‘삼가해주시기’는 ‘삼가주시기’로 바꿔야 한다고 ‘겸손하게’ 제안했다. 이미 가족들은 낯 뜨거워하며 저 멀리 떨어진 상황이었다. 뿌듯하게 돌아온 그에게 가족들은 “그렇게 까다롭게 굴 거면 〈우리말 겨루기〉에라도 나가보라”고 권했다. 깐깐하게 지적하고도 상금을 얻는다니, 그는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참가 신청한 후 ‘이왕하는 것 우승하자’는 마음에 산에 올라가 표준국어대사전을 네 번이나 정독했다. 60만 개 어휘를 외우면서 그는 이상하게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알려지지 않은 어휘와 어원을 찾는 일이 그저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런 그에게 〈우리말 겨루기〉 우승은 어렵지 않았다.


2008년부터는 결혼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학생들이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상을 타오는 것을 보면서 가르치는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가르치기를 2년, 훈민정음학회에서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가르칠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과감히 도전했다. 더 늦으면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그리고 평생 못 잊을 1년을 찌아찌아족 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정덕영씨는 자신의 우여곡절 인생을 어린 시절 읽었던 《빨간머리 앤》에 비유했다.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길이 막상 가보면 구부러진 길이었다는 말이 나와요. 저도 직장 생활하면서 길이 끊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부러진 길이었어요. 지금은 모퉁이를 돌아서 즐겁게 잘 걷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 그는 한국에 발이 묶여 있다.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다녀온다는 것이 바우바우시와 훈민정음학회 간의 행정상 문제 때문에 10개월 가까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사이 지난 1년간의 경험을 담은 책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도 펴냈다. 그는 빨리 찌아찌아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정든 찌아찌아족 아이들에게 아직 가르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언제 돌아오냐고 매일 문자가 와요. 저도 빨리 돌아가서 선물도 주고 한글도 가르치고 싶죠. 다시 그곳 나무 그늘 아래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싶어요.”

사진 : 김동욱
  • 2011년 1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