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자바둑대회 5관왕 차지한 프로바둑기사 박지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여류 9단으로 승단한 프로바둑기사 박지은(29). 지난 10월 초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궁륭산병성배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그는 세계여자바둑대회 5관왕의 기록을 세웠다. 14세에 입단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쌓아온 실력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것. “세계대회에서는 강한 편인데, 국내대회에서는 약한 편이다. 30대에는 국내외 어디서나 활발한 성적을 내고 싶다”는 그의 바둑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동교동에는 박지은 9단이 주축이 되어 운영 중인 바둑연구소가 있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 프로바둑기사 12명이틈틈이 모여 공부하거나 친선 대회를 여는 장소로 활용한다.

“항상 바둑 환경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연구소에 나와서 마음을 가다듬곤 해요.”

오전 10시 그의 연구소를 찾았다. 열 평(33m2) 남짓한 공간에 바둑판이 7대 놓여 있고, 작은 책장과 컴퓨터, 작은 화분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다. 흔히 생각하는 기원이라기보다는 세련된 카페 같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그는 주방 개수대에 쌓인 수어 개의 컵을 씻고 있었다.

“12명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인데요, 여자가 3명밖에 없거든요. 누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제가 자주 하는 편이에요. 뭐 드실래요?”

그는 고무장갑을 벗고, 커피콩을 꺼내 분쇄기에 넣었다. 드르륵드르륵, 향긋한 커피 향이 진동했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핸드 드립용 포트에 부었다. 그는 “핸드 드립의 고수는 아니지만 종종 내려 마신다”고 했다. 그가 내린 커피는 꽤 맛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수수한 카디건 차림의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올해 중요한 일정은 거의 마친 상태예요.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고요. 이번에 우승한 <궁륭산병성배세계여성대회>는 지난해에도 우승했던 대회인데요. 저는 아직도 대회에서 우승하는 일이 신기해요. 어릴 때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냥 바둑이 좋아서 한 거거든요.”

그는 열 살 때 동네 바둑교실에서 바둑을 처음 배웠다. 당시 스승은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 바둑을 계속 공부하라고 했다. 하지만 바둑을 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둑에 몰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바둑 마니아였던 그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심하게 반대하셨다. 하지만 그는 중학교 입학식 다음날 휴학했다. 그리고 열네 살 때 프로바둑기사로 입단하자마자 자퇴했다. 열다섯 살 때는 조훈현 9단과 한 방송사의 바둑 프로그램에서 속기전을 겨뤄 이겼다. 그제야 그의 어머니도 딸의 재능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응원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 혹은 중학교 자퇴가 저의 최종학력이죠(웃음). 글쎄요. 검정고시를 보고 졸업장을 받는 것이 저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에요. 굳이 대학도…. 앞으로도 이런 마음은 변함없을 거예요.”

그는 바둑계에서 프로로 입단하기 위해 정규 학교 과정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요즘은 입단하는 사람이 조금 늘긴 했지만, 그가 입단을 준비하던 때는 1년에 단 2명만 선발했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했다. 바둑학원에서 매일 오전 9시부터 10시간씩 공부해도 입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주변 동료들을 보니 보통 4~5세 때 바둑을 시작했더라. 상대적으로는 늦게 시작한 편이지만, 그만큼 더 재미를 느꼈다”고도 했다.


박지은 9단은 키가 155cm 정도고, 무척 마른 체형이다. 유난히 하얀 손은 고사리 손처럼 작고 얇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그는 우리나라 여류 바둑계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불린다. 여성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9단 승단도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에서는 세 번째다. 국내외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거두고 있다. 때문에 바둑계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실제로 그는 5년 연속 한국기원이 주최하는 ‘바둑대상’에서 여자인기기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굉장히 예민해요. 특이한 사람도 많고요. 아무래도 바둑만 생각하며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웃음). 주변에서 거는 기대가 부담스러울 때가 많죠. 제가 세계대회에서는 강한 편인데 국내대회에서는 약한 편이거든요. 대국할 때 심리상태가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아요. 바둑은 심리게임이거든요.”

그는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대회에 출전할 때 욕심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꼭 우승해야겠다는 생각 대신, 처음에 두는 판만 잘 두자고 다짐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매회 집중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것 같다는 것. 물론 어린 시절에는 우승하고 싶은 욕심도 많았다며 웃었다.

“제 스타일이요? 예전에는 굉장히 공격적이었죠. 바둑에서는 기풍이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는 전투적인 걸 좋아했어요. 빠르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죠. 반대는 수비형인데 실리를 챙기고 튼튼하고 길게 바둑을 둬요. 요즘은 저도 기풍이 실리형으로 바뀌었어요. 완벽한 수비는 아니지만, 실리를 추구하면서 두텁게 두는 것을 선호해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예전에는 무작정 공격만 했다면 이제는 전체적인 균형을 잡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절묘한 수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바둑을 두는 것인데, 임기응변과는 다르다”며 “심지어 ‘절묘하다’는 말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요즘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바둑기사로 사는 것이 다른 분야에 비해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괜찮다는 것이다. 예선전의 1회 대국료는 10만~20만원으로, 본선에 올라가려면 네다섯 판을 이겨야 한다. 하지만 워낙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아서 1년에 본선 두어 개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여자가 바둑을 잘 두는 것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이 여류기사에게는 장점이 되는 것 같아요. 혼성 대회보다 규모는 작지만 여성 전용대회도 적지않게 열리는 편이라서 활동하기에도 수월하고요. 그렇다고 남성 팬들의 관심 같은 건 거의 없고요. 가끔 인터넷 카페에 댓글로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쨌든 남성 기사보다는 괜찮은 것 같아요(웃음).”

그동안의 바둑 인생에서 인상적인 기억을 물었다. 그는 “실수한 일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며 창피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은 세계대회에서 규칙을 어기는 수를 두었는데, 바둑알을 놓으면서도 반칙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훈현 9단과 속기전에서 겨뤄 이긴 일도 들려주었다.

“제가 2단인가 3단일 때예요. 조 사범님과 대국을 한다는 것 자체도 이슈였는데, 심지어 제가 이긴거죠. 속기전은 빠른 시간에 수를 두어야 해서 실수하기 쉽거든요. 제가 존경하는 사범님이세요. 아직도 공부하시고 활발하게 활동하시니까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는 너무 먼 일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보통 30대까지 토너먼트 기사로 활동하는 분위기인데, 예외도 적지 않으니 그저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며, 그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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