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회적 기업] 육근해 ‘도서출판 점자’ 대표, 한국점자도서관 관장

시각장애인의 길을 밝히려던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었습니다

“예닐곱 살 적부터 아빠 손을 잡고 다녔는데,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리거나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끌끌끌’ 혀를 차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국점자도서관 관장이자 사회적 기업 ‘도서출판 점자’의 대표 육근해씨. 그를 지난 7월 폭우가 내리치던 날, 서울 암사동 점자도서관에서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곱고 단정한 그의 외모 안에 깃든 강단과 결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점자도서관은 그의 아버지인 고 육병일씨가 1969년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인을 위해 설립한 점자도서관. 시각장애인에게 읽고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설립한 아버지는 가족들까지 끌고 가시밭길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비록 어릴 적 시력을 상실했지만, 전주의 이름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데다 서울에서 침술원을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신촌대로 2층집에서 살았어요. 딴데서는 멸시를 당해도 은행에 가면 바로 지점장실로 안내되고, 명절 때면 은행에서 보낸 선물이 줄을 이을 정도로 부자였지요.”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버지는 낮이고 밤이고 누군가를 도우러 다니시는 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느라 2남3녀 아이들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발벗고 나서던 아버지는 ‘저들도 공부를 해서 자신들의 길을 가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도서를 만들어 빌려주기 위해 점자도서관을 세웠다. 사재를 털어 동분서주하는 동안 가세는 계속 기울었다. 처음에는 직원을 두고 운영했는데, 나중엔 초등학생 딸까지 가족들 손을 빌려 점자도서를 인쇄했다. 가족들이 생활할 집도 따로 없었다.

도서관 창고에 전기장판을 놓고 생활하다 뒤뜰에 한장 한장 벽돌을 쌓아 올려 함께 생활할 방을 만들었다. 자식들은 퉁퉁 불은 국수로 끼니를 때우는데, 아버지는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줘야 한다며 쌀을 가지고 나갔다.


가끔 어머니가 “우리 자식들도 먹고 살아야 하고, 공부도 시켜야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말하면 아버지는 “우리 애들은 앞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질시를 당할 때도 ‘난 괜찮지만, 당사자인 아버지가 상처입지 않으실까’ 조마조마했어요. 방학 때는 아버지와 함께 산간벽촌까지 다녔는데 그곳에서 만난 분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이런 책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실 때, 내 손때도 묻은 점자도서들이 꽂혀 있는 것을 봤을 때 ‘우리 아버지가 귀한 일을 하시는구나’ 하고 깊이 느꼈죠. 가족들 고생시키는 아버지께 유일하게 반항한 것이 ‘난 돈 벌어서 아버지 안 드릴 거야. 엄마 줄 거야’라고 했던 거예요.”

육근해 관장은 몇 달씩 전기세를 못 내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형편을 보면서 대학 진학의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2년 후 야간대학에 진학해 계산통계학을 전공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 일을 도왔던 그는 “봉사는 계속하겠지만, 이 일을 맡아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문적인 내 일’을 준비하던 그를 아버지가 “조금만 도와달라”고 불렀다.

“내가 흘린 땀도 들어간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몇 달만 도와드리다 형편이 나아지면 직원을 두고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1997년, 도서관이 정부가 지어준 지금의 건물로 옮긴 지 석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 그는 이 일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훈련시켜놓고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2남3녀 중 막내인 그가 왜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되었을까.

“제가 고집이 센 데다 뭔가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 아버지와 닮았어요. 저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해내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점자도서관에서 아버지 일 도와

아버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딸은 아버지보다 더욱 세심하게 장애인들의 필요를 살피며, 일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디지털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가장 먼저 인터넷 전자도서관을 개관하고, 음성전환되는 전자책인 국제적인 디지털 토킹북을 도입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텍스트를 읽어주는 전자책’이 등장했지만, 그는 점자도서를 포기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버리면 이중으로 실명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아무리 전자책이 발전했다 해도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책을 읽는 맛을 재현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장을 한장 한장 손으로 만져가며 읽을 때 곱씹어 생각하는 진정한 독서가 이루어지지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고령이나 지체장애 등으로 책을 읽기 어려운 독서 장애인으로 서비스 대상을 확대했다. 2003년 ‘장애인과 사랑나눔본부’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단으로 출범한 ‘도서출판 점자’는 2008년 사회적 기업인증을 받았다.

“점자책뿐 아니라 묵점자 혼용 책, 촉각도서, 기존의 아동용 도서에 투명한 점자 라벨을 붙여놓은 책, 시력이 약해진 어르신을 위한 큰 글자 도서 등 다양한 책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도서출판 점자’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서 그가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수 없어 가슴 아팠던 시각장애인 부모는 이제, 점자나 투명한 점자 라벨이 들어간 그림책으로 당당히 책을 읽어 줄 수 있으리라. 촉각도서는 시각장애인 아동이 사물의 형태나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책. 촉각도서 《너도 만져보면 알게 될 거야》는 독수리・얼룩말・코끼리・뱀・북극곰 등의 형태와 표피의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명화(名畵)를 촉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 책 《세계의 명화》도 펴냈다. 그가 만든 촉각도서는 지난 3월 볼로냐 국제도서전에 나가 많은 관심을 모았고, 일본 수출을 준비 중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책이 장애인 도서관뿐 아니라 각 지역 공공도서관, 학교,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날을 꿈꾼다. 장애와 비장애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운영을 맡은 후 ‘하려면 제대로 하기 위해’ 사회복지학 석사와 문헌정보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년간 대학교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수직은 이 일과 병행하기 어려워 포기했다”고 말한다. 어렵게 얻은 대학교수직까지 버리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은 뭘까.

“2001년부터 1년 6개월 정도는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워 문을 닫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포기하려 했는데, 그날 밤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어요.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 같았지요. 이 일이 내가 가야 할 길인거지요. 저는 체력도 약하고 부족하지만, 매일 새벽기도를 하면서 힘을 얻어요.”

내 가족, 내 자식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아버지를 닮았다. 맏딸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의논하려 하는데 “네가 고3이야?”라고 물었다가 “엄마 맞아?”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그. 그는 초등학교 3학년과 일곱 살인 둘째, 셋째가 있다. ‘늦둥이인가?’ 궁금해했더니 “아이들이 세 살, 네 살 때 입양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큰애가 ‘엄마가 동생들만 챙긴다’며 질투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제 밥도 해먹이며 잘 돌봐요. 친구들한테도 ‘난 애 보러 가야 돼’라고 한대요.”

“네 인생 네가 개척하는 것”이라며 아이에게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대신 “부모가 옳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는 육근해 관장.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은 그를 보며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삶의 자세나 가치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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