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무료 진료하는탈북 한의사 석영환

“받은 것이 많으니 나누는 것은 당연하지요”

한의사 석영환(46) 씨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을 경호했고,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귀한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어보며 자랐다. 북한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며 평양의대에서 고려의학을 공부하고, 김일성장수연구소에서 연구 의사로 뇌혈관 연구를 도왔다. 하지만 그는 1998년 10월 평양을 떠나 서울로 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유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38선을 넘은 탈북자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프면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 자신의 일처럼 도와준다.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서울에서 그는 자신이 받은 것들을 탈북자들에게 돌려주어야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서울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3분 정도 걸어가면 ‘100년한의원’에 도착한다. 장맛비가 쏟아지던 오후, 석영환 원장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의 진료실 풍경은 여느 한의원과 다르지 않다. 책상에는 컴퓨터 한 대와 우리 몸의 기와 혈자리를 표시한 모형이 놓여있고, 책장에는 고려의학, 가정의학, 중국과 북한의 단어사전 등이 꽂혀 있다. 또 한쪽 벽에는 2002년 2월 22일자로 취득한 대한민국 한의사 면허증이 걸려 있다.

“세 번 만에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첫 번째로 치른 시험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치른 시험이라 붙을 것이라는 기대는 안 했고요. 두 번째는 웬만큼 공부했다 싶었는데 떨어져서 마음이 상했죠. 될 때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준비한 세 번째 시험을 보고 합격해 10년 전 병원을 열었습니다.”

그는 북한과 남한의 한의학은 다른 점이 많다고 설명한다. 북한에서는 배우는 것을 남한에서는 배우지 않거나, 남한에서 다루는 부분을 북한에서는 다루지 않는 식이라고 한다. 때문에 북한에서 한의사를 했다 해서 남한에서 한의사로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탈북한 사람은 30여 명. 이 중 다시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활동하는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한글로 고려의학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남한의 한의학 교재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려웠습니다. 지금껏 객관식 문제를 풀어본 일도 없었고요. 북한의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고, 답을 작성한 후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시험지는 스케치북보다 더 크고요, 유럽식 교육을 받은 거죠.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사람 고치는 일밖에 없으니 다른 선택도 할 수 없더라고요. 탈북한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경우지만, 문화 차이 때문에 직장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딱딱했다. 북한 말투는 아니지만, 왠지 낯설다. 이런 기자의 생각을 눈치 챈 듯 그는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의 말투나 표정을 거칠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이 문화 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게 음식이었어요. 북한에서 먹던 음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고, 간도 센 편이어서 입에 대지도 못했을 정도니까요. 탈북자들이 겪는 고통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제가 그들을 도와야 해요.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들을 이미 겪었고, 해결해가고 있으니까요. 탈북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100년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진실한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는 종로구에 거주하는 탈북자들이 무료로 건강검진과 외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조약을 종로경찰서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탈북자들을 돕고 싶으니까요. 요즘은 냉면집을 운영하는 전철우 씨와 계획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 저는 무료로 탈북자들을 진료하고, 전철우 씨는 진료를 마친 분들에게 무료로 냉면을 드리는 일이지요. 어때요?”

그는 서울에서 열두 살 난 큰아들과 열 살 작은아들, 다섯 살인 막내딸을 낳았다. 아이들은 부모가 38선을 넘어온 탈북자라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고 한다. 때가 되면 알려줄 생각이지만, 아직은 이른 것 같다고 한다.

“아이들이 ‘왜 우리는 할아버지가 없어? 왜 우리는 이모가 없어?’ 하고 물을 때 답답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요….”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표정은 다시 굳었다. 기자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아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 소문 없이 증발했다고 하대요.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겠죠.”

그는 ‘사랑’ 때문에 탈북을 결심했다. 북한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는데,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들은 “당신과 함께 어디라도 떠나고 싶다”던 아내의 소원을 이루고자 목숨을 건 탈출을 계획했다.

“평양에서 문산으로, 철원으로 빠져나오는 루트를 짰습니다. 치밀하게 수십 번도 더 외운 길이에요.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오는 데 정확히 2박3일 걸렸습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하니까, 걷거나 트럭을 얻어 타고 내려왔어요. 작은 가방에 가족사진과 속옷, 여비를 챙겼는데 서울에 와보니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얼마나 소중한 사랑이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다른 가족들의 삶까지 걸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이다”라고 아내를 소개한다. 한의사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아내는 취직을 해서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공부하다가 화가 나서 책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어요. 아내는 그런 제 모습을 바라보고 묵묵히 견뎌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울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북한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하나 이루고 있으니까요.”

그가 근무했던 김일성만수무강연구소는 김일성 일가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설립된 의료기관이다. 의학과 한의학을 적절히 활용해 김일성 일가가 앓고 있는 특정 질환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당뇨나 심혈관계 질환에 효과가 좋은 약과 침 요법 등을 연구했습니다. 연구원들의 연구 결과를 입증할 수 있도록 김일성 일가의 신체조건과 완벽히 일치하는 실험대상자들을 선발해 임상실험도 하고요. 북한과 남한의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굉장히 크고 아프거든요. 탈북자들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미리 약속한 한 시간이 다 지났다. 시계를 보며 성급히 진료실을 나서던 그가 우산 하나를 챙긴다. 그에게 “운전면허는 안 땄느냐?”고 묻자 “좋은 차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벌었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 지하철을 탈 거예요”라며 병원문을 나섰다.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만큼 언제 죽어도 여한은 없지만, 탈북자들을 위해 지금보다 더 시간을 쓰고 싶어요. 이렇게 살려고 총알을 피해 내려온 게 아닌가 싶네요.”

사진 : 김선아
  • 201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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