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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의 모든 것을 담은 ‘난 백과사전’ 《세계의 난》 펴낸 원예학자 윤경은

서양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동양에서는 사군자 중 하나로 아낌을 받아온 난.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난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 거의 없었다. 얼마 전 출간된 《세계의 난》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난 백과사전이다. 이 책을 쓴 윤경은 교수(서울여대 원예학과, 서울여대 총장)는 한국 원예학의 대모(大母)로 불린다. 한국 원예학의 기초를 닦아온 윤경은 교수를 만나러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정원을 찾았다.
정원엔 꽃달맞이・너도부추・리빙스톤・제라늄・으아리・알리움이 피기 시작하거나 한창이었다. 1988년 아파트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아내는 정원을 가꾸고, 남편인 박원목 교수는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와인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농장을 찾아오는 이도 있다. 아담한 다락방에서 그에게 정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요즘 한국의 야생화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직접 세밀화를 그리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난에서부터 희귀 난까지 500여 장의 난 사진이 실린 책 《세계의 난》은 꽃을 피우고 잎을 감상하는 법, 증식과 육종까지 난에 관한 모든 것을 집대성해놓았다.

난에 관한 첫 기록은 기원전 6세기 《시경(詩經)》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난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는 서양에서 더 활발했다고 한다. 17세기 이후 영국 왕립 식물원과 리버풀 식물원 등을 중심으로 난 재배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난 수집이 유행했다.

“식물 애호가들은 종착지처럼 난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꽃이 오래가기도 하고, 꽃이 진 후 잎만으로도 감상할 수 있으니 매력이 많죠. 서양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난을 직접 구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난은 주로 선물로 받은 것이라 귀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일본 여성들은 난에 지극정성이지요.”

그는 식물을 좋아하고 잘 기르는 사람은 배려심이 많고, 식물을 가꾸다 보면 자꾸 호기심이 생겨 키우는 범위도 넓어진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를 위해 ‘난 재배 지침서’를 쓰기로 마음먹은 때가 벌써 30년 전이다. 워낙 난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난 관련 책을 찾기 어려워 무척 답답해하셨다고 한다.

“식물에 관한 책을 내기 어려운 이유가 그 해에 사진을 찍지 못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몇 년씩 넘어가기도 하죠. 실제 재배하면서 사진까지 촬영해야 하니까 시간이 더 많이 걸려요. 이 책은 자료 수집에서 집필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강의하느라, 또 총장을 하느라 바빠 자꾸 중단되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꼭 완성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답답한 마음에 일본책을 보시며 난을 연구하셨는데, 그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난을 공부하면 어떻겠느냐”며 진지하게 권유하셨을 정도였다.

“감나무에 꽃이 가득한 집에서 자랐어요. 겨울에는 까만 쟁반에 홍시가 항상 올려져 있었지요. 가족 모두 뭔가 기르는 것을 좋아해요. 아버지는 〈농경과 원예〉라는 잡지를 즐겨보셨고, 난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일본책을 구해 보셨지요. 반지하에 온실도 만드셨는데, 남쪽은 햇빛이 들고 서쪽은 습해서 적절한 습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난 기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꾸준히 관심만 가지고 있으면 의외로 쉽다고 하셨어요.”

난 관련 책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진을 구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사진 소유자를 찾아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책에 쓰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행운은 뜻밖에 찾아왔다. 인터넷을 뒤지다 덴마크에서 난을 재배하는 아르네 라르센 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메일로 책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필요한 리스트를 보냈더니 아무 조건 없이 난 관련 사진파일을 통째로 보내와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러나 책이 나오기 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지난 5월 갑자기 닥친 일이었대요. ‘하늘나라에서 책을 보고 좋아할 것’이라고 그의 쌍둥이 형이 답장을 보내왔어요. ‘진작 책을 냈다면 보고 갔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요.”

이번에 낸 책이 난 백과사전이라면 ‘마니아들이 기르면 좋은 난 100가지’라는 이름으로 사진 위주의 책도 발간할까 생각 중이다. 그는 오는 9월 서울여대에 플로라아카데미원을 개원한다. 국내 최초의 식물-꽃 전문 아카데미라고 한다. 그가 30여 년 동안 연마한 세밀화와 원예치료, 사진-아로마테라피 등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식물을 기르면서 자연의 이치, 배려심을 배워요

그가 원예 전문가가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유난히 식물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식물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영어 통역관으로 활약하셨는데, 폐병 때문에 금강산으로 요양을 하러 가셨대요. 그러다 금강산 온정리(더운 물이 나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에 작은 여관을 지으셨어요. 지금도 그때 사진이 담긴 우편엽서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그 근처에서 과수원을 하시던 분들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많이 청했다고 해요. 형편없는 과수원도 아버지의 손을 거치면 맛있는 과일을 수확했대요.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범은 특별한 손을 가졌나 보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해요.”

서울에 돌아와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정원을 가꾸며 토마토 등 채소와 과일을 길렀다. 식물은 각자 원하는 바가 있는데, 원예는 그들의 필요를 읽는 일이 중요하다. 그는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롭다”고 말한다.

“남미에는 건기가 있잖아요. 식물들이 그 건기를 견디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살아나요. 나비가 없는 사막에서는 꽃이 냄새를 풍겨서 곤충을 불러들이죠. 또 툰드라 지방의 해토 기간은 한 달이면 돼요. 한 달 안에 꽃이 피고 종자까지 맺힙니다. 한꺼번에 꽃이 피기 때문에 8월이면 아주 장관이에요. 반면 열대지방은 1년 내내 꽃이 피니까 유난히 강한 색과 향으로 나비와 곤충을 불러들이죠. 식물들이 이런 걸 모두 어떻게 알아서 할까 신기하기만 해요.”

그는 일생 식물을 연구했지만 늘 새록새록 다른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온실에 분홍색 달맞이꽃이 피었는데, 어느 날 보니 바람이 없는 데도 꽃이 하늘거려요. 살펴보니 분홍색 나방이더라고요. 나방이 꽃과 같은 색깔을 보호색으로 지닌 거예요. 그전에는 없던 나방이었거든요.”

식물을 기르는 것에 대해 그는 “항상 감탄하게 되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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